배움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첫째는 보고 배우는 것이다. 고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학교제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나 환경 속에서는 이미 앞서간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행동, 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눈으로 보면서 배워왔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이 잠을 잤던 자리를 정리하고 얼굴을 씻고 하는 것은 어린시절부터 보고 자랐기에 그냥 배우게 된다. 부모들이 그렇게 했고, 자기의 형이나 누나들이 그렇게 했기에 그렇게 해야만 집안이 정돈이 되고, 자신 또한 청결해 짐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배움의 두번째는 듣고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좀 더 체계화된 교육제도 속에서 먼저 일어난 일의 경험을 앞서간 자들이 다음에 오는 자들에게 입으로 설명하며 들려주는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훈계이며, 가르침이다. 지금의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이냐는 아직도 많은 논쟁 중에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들려줄 수는 없지만, 오직 실제로 보고 배워야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일이지만 논리적으로 잘 설명함으로 그것을 먼저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의 방법 중에서 말씀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어떤 것이 더 좋은 방법일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주시면서, 이 두 가지의 방법을 다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은 이 두 가지의 방법을 가장 잘 활용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이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듣는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 또한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들의 삶의 구체적인 부분 속에서 어떻게 간섭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실제로 보여 주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말씀의 실제적인 살아 역사하는 능력들을 경험해 왔다.
한 유대인 연구가에 의하면, 유대인들과 우리 개신교인들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 말씀을 대하지만, 유대인들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듣고 강론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인들이 말씀의 진수와 복음의 핵심을 이미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의 핵심을 놓친채 모세 오경에 사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보다 이 세상에서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복음의 핵심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이 미국의 경제와 정치, 법조계와 의료계, 예술과 언론의 모든 부분에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성경의 66권을 온전히 소유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핵심을 우리의 가정에서 먼저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다면,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예술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 놓은 그 업적보다 더 뛰어난 결과들을 이 시대 이 땅에서 이루어 놓을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녀에게 있어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