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곤충학자의 흥미로운 연구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의 집단생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개미가 모여 사는 곳에 불이 났을 경우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한 것입니다. 개미 굴에 나무젓가락을 넣고 불을 붙였습니다. 우왕좌왕하며 다 뿔뿔이 도망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불을 발견한 개미가 자신의 몸을 던져 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다음 개미도 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행동 뒤에 불이 점점 약해지고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개미의 몸을 이루고 있는 '키틴질'이라는 것이 불에 타면 불을 줄이는 소화물질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개미에게는 불에 대응하고 막아낼 지혜와 기술은 없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기의 때를 만나거나 다급한 문제가 터지면 시대와 문제를 해결할 인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환호합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하나같이 실망하며 시대를 구할 인물이 아니었노라 질타와 비난을 퍼부어 댑니다. 이 현상은 '희생'이라는 말이 먼저 우리의 삶에 드러나지 않으면 영원히 반복될 그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기 '과시 놀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교훈 중에 '강도 만난 사람'(눅10)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행하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져있습니다.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으면 곧 죽을 지경입니다. 그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누구는 욕도 하며 지나갑니다. 사람들은 '종교인이, 같은 동족이, 모범을 보여야 할 자'가 사랑이 없다고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강도 만난 자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봅니다. 손을 내밀고 도와주는 것에는 대가가 지불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옷을 버리고, 힘이 들고, 경제적인 손실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희생'입니다. 타인을 위해, 내 주변에 고통 당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남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물론'이나 '능력론'보다 더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전혀 부족함이 없이 존경을 받던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만나 나누는 이야기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내가 어찌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주님은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너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다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롭고, 덕망 있고, 유명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희생'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희생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잃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히 얻는 비밀을 가지고 있음을 말입니다.
성경에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기에 옳은 일을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길, 자신의 생명을 죄인을 위해 내어 놓아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가진 자가 더 풍성히 얻는 길은 열매를 맺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없는 자가 그 있는 것조차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은 희생을 통한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입니다(눅19:11-27).
사랑하는 여러분, 말은 많고 시비(是非)는 잦은데 '희생'이 없는 곳은 망하는 곳입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인물을 찾고 '된다, 안 된다' 하기 전에 당신이 '희생'할 준비는 되었는지 당신이 머무는 곳에 희생의 열매가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