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돕고 구한다는 것은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 시대는 이미 개인중심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혹 공동체 가운데 있더라도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로 힘과 권력의 우월함이 인정받기에 나를 희생해야 한다거나 공동체가 손해를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가끔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의로운 희생의 소식과 가슴 뭉클한 기사를 접하면 가슴 뭉클함을 느끼곤 한다. 소방대원이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생명을 구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소식을 접할 때면 아직 이 세상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손해보는 아름다움이 모습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이 아직은 희망과 소망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본다.
이대도강(李代桃畺, 복숭아나무를 위해 자두나무가 대신 죽음을 감당하다)이 바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고사성어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가에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벌레들과 병균들이 몰려와서 복숭아나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제 복숭아나무는 아무 힘과 능력이 없다. 죽음의 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때 옆에 있는 자두나무가 보다 못해 복숭아나무에 붙어 있는 벌레들과 병균들을 자신의 몸(나무)으로 유인해 복숭아나무는 살리고 자신은 죽는다는 자기희생(自己犧牲)의 아름다운 생명이야기이다. 자두나무(李, 자두나무 이)가 복숭아나무(桃, 복숭아나무 도)를 대신하여(代, 대신할 대) 쓰러져 죽는다(僵, 쓰러질 강)는 병법(兵法) 삼십육계(三十六計) 중 제11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희생했다는 소식이 그리워지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대, 이대도강은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가 환난과 고난 속에서 상대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쳐 생명을 살리는 숭고하고 거룩한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혼탁한 시대 가운데도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생명구원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소식이다. 벌레와 세균들로 죽었던 복숭아나무와 같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인생들을 살리기 위해 인생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한 거룩한 생명 구원의 기쁜 소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서 53장 5-6절에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목숨을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대속의 제물로 주셨다 말씀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은 삼일만에 살아나셨고 다른 사람,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과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복을 받게 된다 약속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영생의 선물은 죄와 허물로 쓰러지지 않고 더렵혀져 가고 혼탁해지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희생의 정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섬김의 정신이 아닐까? 그런데 오히려 세상을 흐리게 만들고 혼탁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희생 하라' '겸손 하라' '섬기라'고 요구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지?
섬김은 대신 죽는 것이다. 섬김은 대신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면서 십자가로 다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