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토스를 이해하는데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그것은 설교자의 파토스, 그리고 청중의 파토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청중의 파토스(pathos)에 대해서 정의하였다. 즉 설교자가 로고스를 말할때 청중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포함하는데, 분노, 적대감, 호의, 기쁨, 즐거움, 동정, 부끄러움, 수치, 두려움, 시기, 경쟁심 등 모든 인간의 감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학에서는 주로 설교자의 파토스를 말한다. 설교자가 로고스를 모든 정신을 쏟아 청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열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바른 에토스뿐아니라 파토스까지 겸비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20세기말 한국에서 미증유의 부흥은 설교의 범람을 가져왔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계적이며, 습관적이고, 비창조적인 작업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수한 설교자들에게서 파토스는 사라져 버리고 낭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방적 전달자가 되는 기현상이 보편화 되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전시대의 설교자들의 뜨거운 파토스를 회복해야한다. 예전 목사들은 설교에서 파토스만큼은 그 어떤 위대한 설교자들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이 한번 설교하면, 세시간, 네시간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사경회가 한주 내내 아침 오전 저녁으로 했고 일년에 그런 사경회를 여러차례 계속 하였던 것이다.
로고스가 설교로서 성공하는 또 다른 축이 에토스만이 아닌 파토스임을 새롭게 자각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의 회복과 이 로고스를 들어야 할 청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혹은 연민, 때로는 긴박성인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설교에 있어 이 파토스는 언제나 응축되어 폭팔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로마서 1장에서 이 복음은! 하고 있으며 이 아들로 말하면! 하고 외치고 있다. 비록 그것이 문자로 갇혀있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파토스의 정신으로 듣는다면 2천년전 설교자의 정열적 파토스를 듣게 될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엇이라 했던가?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만약 설교자 이런 파토스로 무장된다면 청중의 파토스는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설교학에서는 청중의 파토스에만 너무 치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선포적 기능을 무시하고 청중의 파토스에 아부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리하여 강단의 경건성을 잃어버리고 청중이 진정으로 감동해야 할 말씀에 대한 파토스를 한낱 폭소로 날려 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설교자가 파토스의 열정에 불타올라 로고스를 전하는 것은 청중의 진정한 파토스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청중의 파토스가 아멘으로 나타날때 그것이 진정한 파토스의 구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에 있어서 아멘 복창이나 열창은 연습된것이기 쉽다.
마치 후렴구처럼 복창되는 아멘이 파토스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파토스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그 진정성은 성령의 조명아래서 청중의 파토스를 파고 들어야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멘 열창만이 아닌 생활의 변화로 나타나야만 한다.
설교자가 바른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균형을 소유할때 성공적인 설교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