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春園)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의 꿈을, 장자나 윤이상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나비의 꿈을, 포스터나 이상이나 이중섭은 인생의 아름다운 꿈을, 그리고 킹목사는 개혁의 꿈을, 생택쥐베리나 리차드 바크는 높은 이상(理想)의 꿈을 말하였다. 이 모든 꿈들은 그들이 인간인 까닭에 품게 되는 특별한 선물인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지각이 들면서 꿈꾸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꾸거나, 품는 꿈들은 허상(虛想)일 경우가 태반이다. 그것은 소망의 일환으로 그저 바라는 것일 뿐인 까닭이다. 때로 그들이 꾸고 품었던 꿈들이 실현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 잠간 쓰는 너울일뿐 춘원이 땡중 조신을 빌어서 말한 남가일몽(南柯一夢)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왕에 꾸게 되거나 그래서 품게 되는 꿈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꿈, 섭리적인 꿈을 꾸고 품고 사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족장중에 하나였던 요셉은 꿈꾸는 자였다. 오죽하면 그의 형들이 '저기 꿈꾸는 자가 오도다!'라고 하였을까? 요셉은 꿈꾸는 자였다. 요셉의 이야기는 꿈으로 시작되어, 꿈의 진행을 보여주고, 결국 꿈이 실현되는 것으로 끝난다. 17세의 소년으로 나타나 110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요셉의 이야기는 꿈이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과 심지어 그를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사랑했던 아버지 야곱마저 그가 꾼 꿈, 그가 품은 꿈을 그저 인생들이 평범하게 가지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말로 말하면 개꿈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하나님이주신 섭리적인 꿈이요, 자신과 부모형제 자손들 그리고 일가 친척 더 나가서 국가를 구원하는 꿈이며, 성경의 중심인 구속사적 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 꿈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꿈에 대한 정의가 각각인 까닭이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꿈, 혹은 점쟁이들이 말하는 꿈, 또는 인습적으로 말하는 꿈 모두다 다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계시하시고 또 이를 이루시므로 꿈을 계시의 방편으로 자주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계시가 기록의 형태로 존재하기 전에는 꿈으로 자주 나타났으며 특히 구약에는 12번쯤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구약에 기록된 꿈의 내용은 대부분 구속사적 입장에서 나타난 꿈이므로 설화나 전설속의 신화적인 꿈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된 이후 어떤 특정 개인이나, 어떤 특정 집단에 꿈으로 현몽하거나 지시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처럼 너무 자면서 꾸게 되는 꿈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요셉 당시에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형제들을 제쳐두고 왜 요셉에게 이런 중차대한 꿈을 꾸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그에게 영매성(靈媒性)이 강해서 일것이라고 말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무당처럼 영매성이 강해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이 아니고 접신(接神)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담을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아들이어서, 야곱이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하였지만, 그의 형제들과 달리 커가면 갈수록 그 아버지 야곱에게 믿음을 보여 주었기에 더욱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요셉과 같은 내용의 꿈을 꿀 수는 없지만, 우리가 요셉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때 우리에게 비전의 꿈을 주신다. 비전의 꿈은 잠자면서 얻어지는 꿈이라기 보다는 말씀을 통하여 주어지는 꿈이다. 그래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없이 사는 사람처럼 비참한 인생은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는 원동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살게 하고, 꿈이 우리네 인생의 고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2013년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잘 간직하고, 키워나가 '저기 꿈꾸는 자가 오도다!'라는 감탄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지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