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는 1년에 한 두 번 정도 들린 곳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살고 있는 탓인지 친구, 지인, 직장 동료 등과 함께 가끔 찾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사진을 찍었지만 글을 쓴 적은 없다.
강진 도자기 축제 때 다산의 유배지인 다산 초당 등을 다녀와 잠깐 언급한 적은 있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직접적인 글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언론중재위원회 ‘영상보도 초상권’ 세미나를 마치고 첫 번째 들린 곳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그곳에서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85-2번지(다산로 747번지)에 있는 다산유적지까지 버스로 30여분이 걸렸다. 오후 12시 30분 쯤 인근에서 식사를 마치고 2시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를 찾았다.
먼저 다산문화관 앞에 남양주시 서문숙 문화관광해설사가 반갑게 맞으며 일행을 안내했다. 그가 제일 먼저 설명한 곳은 영조의 ‘어가행렬도’이다. 정조가 궁을 떠나 화성으로 행차하는 광경들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그림 하나하나를 서 해설가는 자세히 소개했다.
정조는 11살 때, 당시 막강했던 노론세력에 의해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목숨을 잃은 것을 보고 슬퍼했다. 이 때부터 정조는 왕이 되면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왕에 등극했어도 노론세력에 의해 항상 위협이 도사렸던 정조였지만 어린시절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일편단심이었다. 왕에 등극하면서 그는 지관과 내관을 시켜, 아버지가 어떻게 묻혀 있는지를 알아보게 한다.
그들은 현 서울시립대 자리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보고와 아뢰길 “물고랑창이에 묻혀있다”고 했다. 듣는 왕은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정조는 창덕궁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좋은 명당 터가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명한다. 지관은 “고산 윤선도가 경기도 화성자리를 명당 지목한 자리인데 아주 좋다”고 답했고, 그곳을 추천하게 된다. 왕은 그쪽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이장하라고 명한다. 현재 그곳이 수원 화성이다.
그런데 당시 정조와 정약용 선생 그리고 ‘어가행렬도’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당시 노론세력은 ‘창덕궁을 중심으로 100리길을 벗어나 원행 길을 자주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상소문을 빗발치게 올린다. 아버지 묘를 가고 싶어 한 영조는 옆에 있던 정약용에게 자문을 구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100리 안에서 내 아비를 활발히 만날 수 있겠느냐”고.
정약용은 “강 나루터가 가장 좁은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배다리를 놓고 가면 된다”고 자문을 한다. 그래서 정조는 실측을 하게 했고, 결론적으로 약간 돌아가면 108리가 나오고 직진하면 88리로 줄어들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이곳에 보관된 어가행렬도는 영인본이다. 어가행렬도에 나온 첫 그림은 노량진에서 용산 나루터로 놓은 배다리를 건너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왕이 행차할 때 요즘 같으면 호텔도 많지만, 200년 전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 화성으로 가는 길에 정조는 가까운 관아인 시흥행궁에서 거처를 정해 자고 다시 행렬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림으로 표현했다. 또 창덕궁에 머물다가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화성행군으로 가면서 휴식을 취할 때 활쏘기를 하는 모습 그리고 신하들과 자축연을 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정조는 태조 이성계와 함께 임금 중 활을 가장 잘 쏘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정조가 임금이 됐을 때도 죽이려고 하는 외부세력(노론)이 많았다. 그는 책보기를 좋아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늦게까지 책을 본 이유는 외부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책을 즐기는 임금임은 분명하다. 어가행렬도는 정조의 행차와 활동을 자세히 표현한 그림이다.
다산문화관에는 정약용 선생의 학문세계에서 대표적인 저서인 <경세유포>,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소개도 자세하게 해놓았다. <경세유포>는 국가 전반적인 통치기구에 대한 근본적 개현 안을 담은 책이다. <목민심서>는 지역이나 지방 목민관들의 행동 양식을 담았고, <흠흠신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를 계몽하기 위해 쓴 책이다.
다산문화관 벽에는 정약용 선생이 초서로 쓴 칠언절구의 시와 1813년 비단에 수묵담채로 남긴 ‘매화병제도’가 걸려 있었다. 그중 초서로 쓴 칠언절구의 시의 의미가 궁금했다.
“청첩이 싸인 봉우리 가을빛 속에 있고, 두어 집 울타리는 석양가에 있도다. 멀고 먼 옥(玉) 누각은 삼백리에 걸쳐있고, 찬 구름은 저 멀리 긴 하늘에 있네.”
다신이 낙향해 막강한 노론세력에 휩싸인 정조임금을 걱정하면서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문화관에서 곧바로 다산의 생가로 알려진 여유당(與猶堂)으로 향했다.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돼 1986년 복원됐다. 집 앞 냇가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어 다산은 ‘수각’이라고도 표현했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1800년(정조 24년) 봄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와 지었다. 특히 이와 관련한 사연들이 <여유당 일기>에 잘 표현돼 있다. 다산의 <여유당 일기>에 써 있는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하나 선택해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러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 못한다.”
“이렇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의 말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냇가)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독한 내는 지가 6~7년이나 된다. 당(當)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보고 그만 두어 버렸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써 써가지고 문미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했다.”
다산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집 이름을 ‘여유당’이라고 붙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 23년) 다산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했다. 그해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고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돌아 가신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정조는 정약용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다. 밤늦게 까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흔한 일이 됐다. 그래서 선생이 판서가 되고 재상이 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선생은 1797년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고, 그 뒤 고산부사로 임명돼 외직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온 터였다. 이에 노론은 교활하게도 형 ‘정약전’을 공격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는데,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산은 분노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다산은 자명소를 울려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한다.
정조는 계속 만류했지만 계속 거부하자 정조는 그해 7월 26일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00년(정조 24년) 봄에 아버지 정재원이 낙향했던 것처럼 가족을 데리고 고향 마현리로 내려와 집의 문미에 ‘여유당’이란 현판을 붙이고 은신에 들어간다.
그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 “5질은 남겨서 가전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나머지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다산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린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놓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싸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노론이란 권력 앞에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식을 전해 듣고, 쓰라렸던 다산의 아픈 심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날 서은숙 해설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는 전문가답게 다산이 생활했던 일거수일투족을 잘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여유당을 잠시 둘러보고 다산 묘로 향했다.
정약용 선생(1762~1836)의 묘는 숙부인 풍산홍씨(1761~1838년)와의 합장묘이다. 풍산홍씨는 다산보다 한 살 위였고, 다산이 사망하고, 2년 뒤 남편 곁으로 갔다. 묘지를 올라가기 전에 설명 표지판은 정약용 선생의 이력을 나름대로 잘 정리해 놓았다.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열수 정약용(丁若鏞)의 자(字)는 미용(美鏞)이고,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는 ‘여유’이다. 부친 정재원은 음직으로 진주목사까지 지냈고, 모친인 숙인 해남윤씨는 윤선도의 후손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로 영조 38년(1762년) 6월 16일 열수(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에서 다산 선생을 낳았다. 15세 때 풍산홍씨와 장가를 들었고 홍씨는 무인 출신으로 승지와 절도사를 지낸 홍보화의 딸이었다. 선생은 어려서 총명했고,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했다.
16세 때(정조 1년 1777년) 성호 이익 선생의 유저(遺著)를 처음 보고 감명을 받았다. 사돈이던 이벽과 매형이었던 이승훈을 통해 서양서적을 접하면서 새로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실학(實學)과 서학(西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한편, 다산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잘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 시험에 열중했고, 22세 때(정조 7년 1783년) 소과에 합격해 생원이 됐다. 이어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만 하면서 그 유명한 ‘중용에 관한 문답’으로 정조대왕의 인정을 받았으며 28세(정조 13년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다. 이 때부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해 간다. 문과에 합격한 그해 한강 배다리를 설치했으며, 31세 때 수원 화성을 설계했다. 현재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33세에 홍문관 수찬에 이어 경기 암행어사로, 36세 때 곡산부사로, 38세 때 형조 참의로 활약했다. 그는 정치 사정이 좋거나 나쁨에 상관없이 심혈을 기울어 백성을 위한 정치적 개혁을 추구해 갔다. 다산이 속한 남인은 변암 채제공 선생을 영수로 해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안정복 등이 중심이 된 개혁세력으로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그러나 봉건적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옹호하는 성리학만을 신봉하던 보수집권세력인 노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이 때 노론은 성리학에 대해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서학은 정적을 없애는 빌미로 이용했다. 다산도 이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정승으로 쓰일 큰 재목인데도 불구하고 유배와 좌천, 근신을 거듭했다.
정조 14년 1790년 다산은 예문관 검열로 발탁됐는데 노론이 반대하자 그 직을 사양했다. 이로 인해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충청도 해미에서 10일간 유배생활을 한다. 34세 때(정조 19년 1795년)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의 여파로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6품 금정찰방으로 좌천됐고, 36세 때(정조 21년 1797년)는 6월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으나 젊은 날 서학을 받아들일 것을 반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나자 곡산부사라는 외직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선생은 유배, 좌천, 근신을 거듭하면서 은연자중하며 지냈고, 끝내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1800년 봄 처자를 데리고 낙향해 당호를 ‘여유당’이라 짓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그해 12월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후 노론은 11살의 순조를 옹립하고, 정순왕후의 섭정아래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모든 정적을 제거한 뒤 세도정치에 돌입하게 된다. 다산의 나이 40세 때다. 셋째형 약종은 죽고, 우여곡절 끝에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그리고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47세 (순조 8년 1808년) 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의 산 밑에 있는 윤단의 산정(다산 초당)으로 이주해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 이곳에서 선생의 학문에 있어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과 경세학에 대한 집중적 연구가 이루어졌고, 필생의 역작인 <경세유포>와 <목민심서>도 이 시기에 초고가 이루어졌다. 황상, 이강회 등을 비롯한 18명의 제자를 길렀고, 혜장, 초의와 같은 고승들과도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57세(순조 18년 1818년) 가을 해배돼 고향 마현리로 돌아왔다. 이후 저술활동을 계속했고, 미완이었던 <목민심서>완성했다. 그리고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을 저술했다. 75세(현종 2년 1836년)의 회혼일인 2월 22일 이곳 마현리 정침에서 서거했다. 4월 1일 선생의 유언에 따라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됐다. 사후 74년 만인 1910년 (융희 4년) 7월 18일 조정에서 선생을 정이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으로 추종하고 문도공의 시호를 내렸다.
다산 묘를 가는데 유교 개념인 동입서출에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내려왔다.
선생은 영면 직전 두 아들에게 집 부근에 묻어 주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두 아들이 충주에 나주정씨 선영이 있기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된다. 선생은 재차 “내 집 가까이에 나를 묻어 둔 것이 효”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생이 타계한 뒤 두 아들은 부친의 유언을 따라 마현리 집 뒤 언덕에 안장하게 된다.
다산은 구척 깊이로 파라든지, 아내가 죽으면 합장을 하라든지 등 묘를 쓸 때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자 다산과 풍산홍씨가 묻힌 합장묘가 나왔다. 묘는 둘레담으로 곡장처리가 돼 있었다. 당시 곡장처리는 왕과 왕비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남양주시에서 다산 묘 둘레에 곡장처리를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다산 묘의 망주석은 ‘여기가 다산의 묘자이다’라는 것을 잘 알리고 있는 듯했다.
다산이 영혼이 돼 와 먹고 놀다 간다는 상이 혼유석(상석 뒤에 위치)이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동쪽으로와 혼유석에서 음식을 먹다 놀고 서쪽으로 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에 따른 유교적 개념에서 묘가 구성돼 있다. 신이나 영혼이 동쪽에서 와서 서쪽으로 간다(東入西出)는 것을 유교에서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석 앞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참배객들이 술과 과자, 꽃 등을 올려놓고 간다고. 죽어서도 복을 받는 듯했다.
묘비에는 ‘숙부인 풍산 홍씨 문도공 다산 정약용 선생 지묘’라고 써 있다. 묘비를 보면서 ‘숙부인 풍산 홍씨’라는 말의 ‘숙부인’이라는 말이 궁금했다. 마치 서문숙 해설사가 자세히 설명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편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남편이 영의정을 하면 정경부인이다. 내 남편이 장관을 하고 있으면 정부인이라고 한다. 정약용은 오늘날 청와대 비서관급인 정삼품 정도여서 숙부인이라고 한다. 관직이 없는 뭇 백성이 죽으면 신위냐 유인을 앞에 붙인다.”
다산의 비석은 나주정씨 문중에서 세워 놓았다. 하지만 묘비에 쓴 문구가 전통 관례에서 벗어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 종서로 쓸 때 남자(정약용)가 오른쪽에 여자(풍산홍씨)가 왼쪽에 와야 예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약용과 풍산홍씨의 비석 글씨는 반대로 돼 있기 때문이다.
나주정씨 문중에서 조상 비석을 세웠다고 하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인 것이다. 이날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일행들이 유교 예법(법통)에 어긋난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묘에서 서쪽 길 아래로 내려와 ‘자찬묘지명’ 설명 표지판이 보였다. 자찬묘지명은 1822년 정약용 선생이 회갑을 맞아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묘지명이란 이름으로 사실대로 적은 것이었다.
이날 다산문화관, 여유당, 다산 묘, 사당(문도사), 자찬묘지명, 다산동상, 거중기모형 등을 살폈고 가고 싶었던 실학박물관은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