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재계 거목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 회장은 6년 투병 끝에 별세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 뒤 6년 간 투병해왔다.
당시 이 회장은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인근 순천향대학 서울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CPR)을 받았다.
이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져 막힌 심혈관을 넓혀주는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고 심폐기능이 정상을 되찾자 입원 9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병원 20층에 있는 VIP 병실로 옮겨져 장기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타계했다.
삼성전자는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지난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 사후 핵심 경영권을 승계 받아 무역 중심이던 회사의 방향성을 전자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삼성그룹을 글로벌 유수의 기업으로 변모시킨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다.
이 회장은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53년 일본에 유학했고, 다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1965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고,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고인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시기는 1966년 9월이다. 그는 같은 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해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 회장은 이른바 '신경영'을 내세우면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주창했다. 신경영은 지난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열린 선언식에서 그가 했던 발언인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영은 1993년 삼성전자 세탁기 불량 사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내 전자제품 매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이 매장 구석에 먼지 쌓인 채 놓여있던 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제시된 경영 의제다.
고인의 질적 성장에 대한 위기 의식이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신경영을 시작으로 삼성그룹이 글로벌 시장의 무명 기업에서 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4년 10월 첫 애니콜 제품인 'SH-770'를 내놓는 등 휴대전화 시장에서 본격적인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와 관련해서도 이 회장은 품질 경영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른바 '구미 화형식'으로 불리는 불량 제품 소각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미 화형식은 1995년 구미 운동장에서 500억원 상당의 불량 전화기를 불태운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 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소각을 지시했다고 한다.
같은 해 8월 애니콜 제품군은 당시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였던 모토로라를 제쳤으며, 국내 시장 점유율 51.5%를 기록하면서 지배력을 확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그룹의 다른 한 축인 금융계열도 이 회장 시대에 구축됐다.
삼성그룹은 1988년 3월 삼성신용카드·동성투자자문을 설립하고 1991년 11월 현재의 삼성증권이 되는 국제증권을 인수했다. 1993년에는 삼성파이넌스와 삼성JP모건투자신탁을 세우면서 보험·증권·카드 등을 아우르게 됐다.
고인의 경영 철학 가운데 하나는 '인재 양성'이었다. 그는 1994년 학력과 성별을 철폐하는 열린 채용 제도를 도입했으며, 2002년부터 계열사별로 월별 핵심 인력 확보 실적을 확인했다. 연말 사장단 인사에서도 인재 영입 실적을 적잖이 반영했다.
이 회장은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의 직원을 먹여살리는 인재경영의 시대, 지적 창조의 시대"라고 말했던 바 있다.
그는 여성 채용 인력 비중을 30%로 늘렸으며 세계 시장별 맞춤형 인재 육성 제도인 지역전문가를 도입, 선발 인원 가운데 30%를 여성으로 배정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경영 능력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2002년에 세계 전자 업계의 선도 기업이던 소니를 넘어서면서 삼성을 바라보는 글로벌 기류가 크게 변했다.
비즈니스위크,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포춘, 타임 등은 특집 형식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부상한 삼성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면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2002년은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반도체 관련 기술과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당시 1위 기업인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낸드플래시 개발을 고집했다고 한다.
고인은 2005년 들어 '창조 경영'을 내세우면서 신사업 개척을 강조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신수종사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바이오, 나노, 로봇 등과 같은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당시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지난 70년은 삼성그룹이 앞선 기업들을 벤치마킹하고 이를 통해 초일류 기업들을 따라잡는 시기였다"며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 지금은 남들이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2008년 비자금 사건으로 삼성 특검이 꾸려진 이후 경영 일선에서 퇴진했다. 특검 조사 이후 삼성그룹은 수뇌부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차명계좌 실명 전환 등의 내용이 담긴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2010년 3월 경영을 재개하면서 휴대전화 시장에서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장에서는 미국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의 주류가 스마트폰으로 바뀌어가는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회장 복귀 이후인 2010년 들어 삼성그룹은 휴대전화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확고히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 7월 삼성전자의 액정디스플레이(LCD) 사업부와 자회사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등을 합병해 삼성디스플레이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삼성디스플레이는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독점에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또 옴니아 등 시행착오를 겪고 갤럭시 브랜드를 통해 애플 독점이나 다름없던 스마트폰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당시 시장 흐름을 선도하지 못한 종전 주류 기업인 모토로라, 노키아 등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글로벌 영향력을 상실해 현재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삼성그룹이 전자 계열사를 통해 안정적 수익을 내며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기틀은 이 회장 시기에 구축된 것이다. 현재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는 분야가 반도체, 휴대전화 등 고인이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회장의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조화와 조문도 정중히 사양한다는 방침이다.
이 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등이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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