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 인플루엔자(계절독감) 백신에서 복수의 사망자가 나오면서 독감 국가예방접종사업이 중요한 갈림길에 섰다.
백신 자체의 독성 문제는 아닐 거란 전문가 검토 결과를 토대로 예방 접종은 일정대로 추진하겠다는 게 보건당국 생각이었지만 제조(로트, lot) 번호가 같은 4개 백신과 관련해 사망자가 2명씩, 총 8명 확인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같은 제조 공정에서 만들어진 백신이 문제될 경우 해당 백신의 접종 중단 가능성을 시사한 만큼 오는 11월까지 고령자와 소아·청소년, 임신부 등 전 국민의 37%인 1900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할 계획이었던 독감 백신 국가예방접종사업은을 예정대로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23일 열리는 예방접종 피해조사반 회의 및 예방접종 전문위원회를 통해 독감 백신 예방접종 중단 여부가 결정될지 주목된다.
질병청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4시 기준 질병관리통합보건시스템 등으로 신고된 인플루엔자 백신 접종 이후 사망자는 25명이다. 같은 날 0시 기준 12명 이후 13명이 추가로 확인됐다.
25명 가운데 19일 접종 이후 중증 사례로 신고됐다가 22일 오전 1시10분께 사망한 사례는 포함되지 않았다.
16일 1명, 19일 1명, 20일 4명, 21일 10명, 22일 9명 등 최근 일주일 사이 25명의 사망자와 관련해 사망 전 독감 백신 접종 이력이 확인됐다.
25명 중 22명은 국가 예방 접종 백신이며 3명은 유료 접종(국가 예방 접종 대상 1명, 비대상 2명) 백신이다.
문제는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동일 백신 제품, 동일 제조 번호 접종자가 확인됐다는 점이다. 제조번호가 같은 백신은 ▲지씨플루쿼드리밸런트 Q60220039, 어르신용 ▲플루플러스테트라 YFTP20005, 어르신용 ▲스카이셀플루4가 Q022048, 어르신용 ▲스카이셀플루4가 Q022049, 어르신용 등이다.
앞서 21일 질병청은 최종 부검 결과를 포함해 사망 원인과 백신 간 연관성을 최종 확인하는 데 2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국가 예방 접종을 지속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감염, 신경질환, 면역질환, 알레르기성 질환 전공자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법의관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예방접종 피해조사반 회의 결과 2020~2021절기 인플루엔자 백신 자체에 독성 물질 등의 문제는 없다는 데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동일 제조번호 백신을 접종한 다른 접종자, 특히 같은 날 같은 의료기관에서 접종한 사람들로부터도 중증 이상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8명의 사망자가 2명씩 같은 4개 제조번호 백신을 접종한 사실이 확인된 만큼 추가 검토가 불가피하게 됐다.
이와 관련, 정 청장은 22일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종합 국정감사에서 '같은 로트번호에서 추가 사망자가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해당 로트는 봉인 조치하고 접종을 중단하면서 식약처(식품의약품안전처)에 재검정을 요청한다"고 답했다.
국민의힘 등 야당의 계속된 접종 중단 요구에 정 청장은 "오늘(22일) 신고된 정보와 조사결과를 종합해 판단하겠다"고도 말한 바 있다.
대한의사협회도 2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명확한 인과 관계 규명을 위해 국가 예방 접종은 물론 사망자가 보고된 유료 접종에 대해서도 일주일간 접종을 유보할 것을 권고했다. 회원 의료기관에 23일부터 접종을 중단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질병청은 23일 예방접종 피해조사반 회의 및 예방접종 전문위원회를 열고 예방 접종 상황과 대책 등에 대해 논의한다.
질병청 관계자는 "올해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관련해 내일 3차 회의를 비공개 영상 회의로 개최한다"며 "(백신 접종 중단 여부에 대해선) 예방접종 피해조사반 회의 등을 개최해 추가 신고 사례를 전문가와 종합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가 예방 접종 일정을 중단할 경우 자칫 인플루엔자 유행에 대응하지 못하거나 또다시 한꺼번에 접종자가 몰릴 우려가 있다.
지난 21일 0시를 기준으로 국가 예방 접종 대상자 1893만5167명의 접종률은 44%정도(835만6096명) 만 12세 이하가 68.8%로 가장 높고 생애 첫 접종으로 2회 접종이 필요한 생후 6개월~만 9세 이하 어린이 가운데 1차는 54.6%, 2차는 19.7%가 접종을 마쳤다. 만 13~18세 48.2%, 임신부 34.1%, 만 62세 이상 31.1% 등이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독감 유행주의보 발령 시점은 12월1일, 11월16일, 11월15일 등이다. 독감 백신 예방 효과는 접종 2주 후부터 나타나는 점을 고려할 때 11월까지 예방 접종을 마칠 필요가 있다.
현재 생애 첫 접종으로 2회 접종하는 생후 6개월~만 9세 어린이(9월8일 시작)를 제외한 국가 예방 접종이 필요한 어린이·청소년과 만 62세 이상, 임신부 등의 접종 일정은 이미 유통 과정 중 상온 노출 등으로 미뤄진 상태다.
상온 노출과 무관한 만 12세 이하와 임신부는 9월22일에서 25일로 3일 연기됐지만 상온 노출 등으로 조사가 필요했던 만 13~18세는 10월13일로 21일 연기됐다. 접종자 분산을 위해 이달 13일 만 75세 이상부터 만 70~74세, 만 62~69세 등으로 나이대를 세분화한 어르신 대상 접종도 만 70세 이상이 19일부터, 만 62~69세가 26일부터로 접종 일정이 변경됐다.
아직 독감 백신과 사망 사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나오지 않은 반면 독감 백신을 접종하지 않아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연세대학교 산학협력단이 2018년 당시 질병관리본부 의뢰로 조사한 '인플루엔자로 인한 질병부담 분석'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8년 5월까지 인플루엔자 절기별로 단순히 인플루엔자 진단(J09, J10, J11) 사망자 수를 조사한 결과 2013~2014절기 761명, 2014~2015절기 1192명, 2015~2016절기 833명, 2016~2017절기 1050명, 2017~2018절기 2752명 등이다.
정은경 청장도 22일 국정감사에서 "1년에 독감 관련 합병증 사망자는 3000명 내외로 추정된다"며 "어르신 같은 고위험군에서 인플루엔자로 다른 합병증 생길 수 있다. 접종을 하는 게 안전하다"고 말했다.
일주일 예방 접종 유보를 권고한 의협도 접종 유보가 접종 중단을 뜻하는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코로나19 유행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특히 고령층 등 고위험군에 대한 예방 접종이 필요하다는 보건당국의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당장 조사 필요성엔 동의하면서도 예방 접종을 중단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현재로선 인플루엔자 접종 지속보다 중단에 따른 피해가 훨씬 크고 부검 등에 최소 2주가 필요한 상황에서 의협 주장처럼 1주 연기했을 때 충분한 규명이 가능할지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예를 들어 25명 중 20명이 같은 로트 번호 백신을 접종했다면 의미가 상당히 있다고 보지만 1개 로트에서 나온 백신이 10만~20만도스라면 그 중에 2명은 우연히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김 교수는 국민들이 백신에 대해 신뢰할 수 있도록 "부검 결과만 기다릴 게 아니라 식약처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로트 번호 백신을 수거해 안전성 검사를 빨리해야 한다"며 질병청뿐 아니라 식약처의 적극적인 대응을 강조했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사망자가 확인된 동일 제조번호 백신 제품에 대해) 한번 확인해볼 필요는 있는데 확인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며 "역학적 연관성은 크지 않아보인다"고 말했다.
엄 교수는 "미국의 한 연구 결과(https://doi.org/10.1016/j.amepre.2013.02.020)에 따르면 백신을 10만회 접종하면 사망 사례가 6명 정도 생긴다고 한다"며 "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 희생자가 수천명에 달할 수 있는 만큼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인플루엔자 예방 접종은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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