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도산 탄신 141주년기념 학술대회가 ‘도산선생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및 계몽운동’이란 제목으로 30일 도산안창호기념관 점진홀에서 열렸다. 송하연(이화여대) 박사는 ‘도산 안창호와 상해의 청년들’을 발제했다. 그에 따르면, 안창호는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준비론”을 준비했는데, 구성원 대부분은 청년들이었다.
송 박사는 “1919년 흥사단이 출범했다”며 “흥사단 원동위원부 청년들은 서북 청년들 중심으로, 안창호와 동향 이었다”고 밝혔다. 가령 흥사단 멤버로 외무차장 여운형, 재무차장 윤현진, 황진남, 이광수, 김여제 등이 있었다.
특히 그는 “서북 청년들은 그간 정계에서 배제됐고, 불만은 축적됐다”며 “실력만이 정계 진출의 기준이었던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큰 공감을 샀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서북 지역은 중국 접경지역으로, 이들은 서구 문명에 익숙했다”면서 “실력을 양성해 개인·민족의 성공을 이루자는 서북 청년들의 환심을 샀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이 자아실현을 갈망했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샀다고 했다. 그는 실력양성론을 놓고 “개인의 실력이 곧 민족의 실력이고, 이는 민족의 독립으로 이어 진다”는 주장이라며, “개인의 성장을 원했던 청년층의 지향과 일치했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그는 “흥사단은 조선 청년들의 이런 열망을 물질적·방법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예로 그는 최초의 모스크바 비행학교 유학생 김공집을 들었다. 그는 “김공집은 1925년까지 흥사단원으로 활동했고, 안창호의 자금 지원으로 모스크바 비행학교에 입학했다”고 진술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산은 1920년 초까지 국내에 선전문 살포와 독립 단체 간 연락망 구축”을 위해 “비행기를 구입하려 했다”고 전했다. 때문에 그는 “김공집은 도산에게 비행기를 통한 선전 계획을 실현시킬 통로였다”고 덧붙이며, “도산의 실력양성론은 비행기술 같은 근대직업을 꿈꿨던 청년들의 열망과 일치됐다”고 강조했다.
이런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은 1918년 말까지 이어지다가, 이듬해 3·1운동을 만나 ‘독립전쟁론’으로 선회했다. 다만 송 박사는 1920년 1월 3일 신년축하식 연설에서 “즉각 개전보다, 先 준비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즉 그는 안창호가 말한 선 준비란 “국민들이 직업을 가져, 세금을 납부하고, 정부 재정을 튼튼히 할 것”이라며 “국민개병·국민개업·국민개납주의”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안창호의 다른 면모를 말했다. 그는 “도산은 1919년 6월, 일제 관공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열단체인 구국모험단을 결성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구국모험단은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면서, 무장 항일 투쟁을 위해 화약 제조에 힘썼다”며 “점진적 독립전쟁에 어긋나는 작탄 투쟁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가령 그는 “구국모험단 소속 김성근은 국내 폭탄 의거를 위해 대원 파견·비용을 도산에게 요구했다”며 “그러나 도산은 이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왜냐면 그는 “안창호는 산발적 작탄 투쟁이 독립 운동의 동력을 분산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며 “작탄투쟁은 ‘政府의 要求하는 時期’ 통일적으로 이뤄져야한다”는 도산의 주장을 빌렸다.
이처럼 그는 “도산은 준비론과 실력양성론 둘 다 견지했다”며 “준비론은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중심으로, 매우 점진적인 형태였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독립 전쟁 준비론은 외교론과 주전론의 중간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그러나 1920년의 러시아와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이 모두 실효를 발휘하지 못했다”며 “임시정부의 재정과 활동이 미비해짐에 따라, 도산은 준비론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혀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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