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제 36회 기독교학문학회가 ‘생태, 환경, 그리고 교육’을 주제로 26일 오전 10시부터 성균관대 경영대 호암관에서 학회를 개최했다. 첫 번째 주제 강연으로 스트라스부르 신과대학 종교철학 프레데렉 로뇽 교수가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과 도전’을 전했다.
그는 전 지구적 생태계 위기로 “창세기의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구절의 오독(誤讀)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야훼 문서는 살아있는 생물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윤리를 말하고 있다”며 “에덴에서 인간은 피조물을 돌보는 위치에 있었다”고 전했다. 여기서 그는 “돌보다(פקד)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에서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피조물을 지배하는 개념”에서 “책임과 사랑으로 피조물을 양육하는 개념”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욥기 38-41장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부분”이라고 덧붙이며, “재난과 죽음으로 피폐해진 욥의 불평에, 하나님은 더욱 철저하게 인간의 요구를 상대화 한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하나님은 욥 앞에서 우주의 광대함을 말하면서, 인간이 없이도 아주 잘 돌아갈 수 있는 창조세계의 광활함을 나열 한다”고 밝혔다. 하여 그는 “하나님은 고통 받는 인간이 탄식 중에도 먼저 겸손한 자세를 가지도록 촉구 하신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중심적 구원에서 벗어나 피조물 등 전체 세계의 구원을 말하는 대목은 로마서 8:18-23절이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썩어가는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한다”며 “이는 구원의 우주적 차원을 환기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마태복음 28:19, 누가복음 24:47을 빌려 “복음은 열방 민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에 선포돼야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본문들은 협소한 인간중심주의로 환원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다.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그는 계시록 5:13-14절에 대한 프랑스 신학자 자끄엘륄의 해석을 빌렸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 하더라”(요한계시록 5:13-14)
“인간을 배제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언급은 반대로 인간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별은 두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은 선택된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은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지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하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나는 물질과 생물체들을 무자비하게 남용하고 착취한, 창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고 믿는다”(자끄 엘륄, ‘계시록 움직이는 건축물’ p.293)
물론 그는 “인간중심주의 비판은 인간에 대한 광적인 비하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즉 그는 “성서 전체의 방향이 오직 인간을 향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셈”이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이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사랑과 책임'의 변증법”이라며 “양극은 서로 대립하면서 서로 키우고 부양 한다”고 밝혔다. 가령 그는 “목자가 자신의 양떼를 학대하지 않으며, 지키고 보호해 양육하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끄 엘륄을 재차 빌려 “르네상스에 진입하면서, 이 변증법이 무너졌다”고 꼬집었다. 특히 그는 “사람들은 책임과 사랑을 망각한 채 오직 지배만을 획책했다”며 “지구의 황폐함을 촉발하는 생산제일주의는 이런 변증법의 붕괴로부터 기원 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그는 “생태학적 위기의 출구는 원래의 변증법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진술했다.
다만 그는 자끄 엘륄이 ‘기술’과 ‘기술들’을 구분한 측면을 설명하며, "자끄 엘륄이 무분별한 기술 비판론자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프레데렉 로뇽 교수에 따르면, 자끄 엘륄은 ‘기술들’을 두고 “인간과 자연환경을 매개하는 도구로서, 인간 삶의 편리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자끄 엘륄은 ‘기술’에 대해 “효율성의 추구가 지배하는 수단들 일체”라고 반박했다. 이를 두고 그는 “기술들의 물질적 요소뿐만 아닌, 가치와 정신이라는 비물질적 요소조차 ‘효율성’으로 포박하는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로뇽 교수는 “기술 사회의 모든 가치, 동기들은 효율성의 제단에서 파기되고 배제 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 삶의 양식 속에서 모든 非기술적인 측면인 정치, 예술, 오락 등은 기술적인 측면으로 환원 된다”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기술은 오늘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율적 세력이 됐다"며 “기술은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전했다. 바꿔 말해, 그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허용하는 신성 모독적 존재가 됐다”고 비판했다.
이 대목에서 로뇽 교수는 자끄 엘륄의 기술 혁신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전했다. 그는 “기술은 긍정·부정의 양가적 특성을 지니”며 “부정적 효과를 막기 위한 기술혁신은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고 했다. 이는 “문제를 막기 위해 새로운 기술혁신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그는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기술혁신은 결과적으로 해결책보다 문제들을 더 많이 산출 한다”고 지적했다.
기술혁신의 신기루를 비판하며, 그는 덴마크 물리학자 쇠렌 라르센의 ‘라르센 효과’를 인용했다.
“기술로 발생한 문제들은 기술적인 해결책들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기술적인 해결책들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문제들을 산출한다. 그것이 계속 이어 진다”
아울러 그는 “모든 기술 혁신이 긍정적 효과와 악영향을 동시에 산출 한다”면, 그리고 “인간이 기술의 좋은 혜택만을 선별해 보전하는 능력이 없다”면, “기술진보는 이전보다 터무니없는 비용을 치러야한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술이 양가적이라면, 내일의 기술도 전대미문의 문제들을 산출할 것”이라며 “기술 폭주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지적했다. 도리어 그는 “기술은 자체적 영속화를 위해, 혁신으로 발생될 문제들을 필연적으로 정당화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기술만능주의 시대, 인간에게 필요한 윤리적 덕목은 무엇일까? 그는 자끄 엘륄의 주장을 인용해 "그리스도의 형상 따라 非능력(non-puissance)의 윤리에 진입할 것”을 강조했다. 이로써 그는 “피조물에 대한 무분별한 지배를 포기할 것을 요청 한다”며 "非능력은 기술만능주의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핵심 사상"임을 역설했다.
그는 非능력을 두고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면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적 예로, 그는 “살인의 금지”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非능력은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실행하지 않는 의식적이고 이성적 선택”이라며 “기독교의 윤리는 자유의 윤리뿐만 아닌, 非능력의 윤리”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그는 “전능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非능력의 극치”라고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기술 발전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세태”에 반해, “非능력은 절제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생태학의 핵심 열쇠”라고 그는 부연했다.
논의를 확장해, 그는 “우리의 필수적 욕구들을 수정하는 지혜”를 통해 “기술 혁신으로 구원을 기대하는 대신, 절제의 사회로 이행하는 길에 진입해야 함”을 강조했다. 가령 그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발전의 이용, 전기자동차의 장려, 중앙 에어컨 시설 등”을 제시하며, “‘녹색 성장’을 촉진하는 모든 계획을 포함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로써 그는 자끄 엘륄을 빌려 “이탈적 참여(engagement degage)"을 '견지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기술혁신이 효율성의 이름으로 세계를 포박할 때, 이로부터 좀 더 의연해 지는 것“이라고 그는 정의했다.
왜냐면 그는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고,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는 언약(롬 8:39, 마28:29)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세상을 구원할 근거는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세상 한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며 의연하게 사는 것“이 바로 ‘이탈적 참여(engagement degage) 정신’이라고 역설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