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심포지엄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NCCK 100주년 기념사업특별위원회는 제 1차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심포지엄 ‘기독교사회운동의 정체성’을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8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개최했다. 3번째 발제로 숭실대 김명배 교수는 ‘연구동향으로 본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 인식’을 발제했다. 논찬에는 고지수 박사가 수고했다.

그는 “한국교회는 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 등장으로, ‘반독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개진했다”며 “유신체제 종언과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종식에 이어, 87년 민주화를 이뤄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80년대 기독교 사회운동은 도시산업선교, 도시빈민운동, 재소자 인권보호운동, 언론 자유화 운동 등으로 분화됐다”고 전했다. 또 그는 “당시 기독교 사회 운동 진영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한반도 평화통일 운동은 불가분이라 생각했다”며 “둘을 묶어 ‘같이’ 가야한다는 인식 전환이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운동의 중점적인 축은 ▲장로교 전통의 칼뱅신학과 바르트 신학 ▲민중 신학 ▲성서의 희년 신학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등이 있다. 여기서 그는 “70-80년대 기독교 사회 운동의 핵심 사상은 칼뱅의 그리스도 주권론에 기초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기독교장로회 김재준 목사는 ‘칼뱅의 그리스도 주권론’의 신학노선을 견지했다”며 “또한 칼 바르트의 신 정통주의에도 영향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민중 신학을 두고 원성훈 교수를 빌려 “기독교 진보 세력이 유신체제기간에 추구했던 정치체계는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와 유사했다”고 평가했다. 때문에 그는 “민중 신학이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게 자본주의 체제를 복지국가로 개혁하거나, 자유민주주의를 계속해서 견지해 왔다”고 설명했다.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심포지엄
(왼쪽부터) 논찬자 고지수 박사, 발제자 김명배 박사, 사회자 송병구 박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또 그는 성서의 희년신학을 두고 “희년은 50년 마다 노예 됐던 자가 ‘자유’와 ‘해방’을 얻고, 땅이 원소유자에게 돌아가는 ‘회복’의 제도”라고 설명하며, “이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분열과 갈등, 결함과 상처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해’를 뜻 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당시 기독교 사회 운동은 희년을 창조질서의 보전, 토지 공개념, 경제정의 실현, 민중 해방으로 보았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민중 신학자 안병무를 빌려 “불의한 사회구조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법적권리와 생존권을 회복시켜주는 특별한 해”라는 해석도 전했다. 김명배 교수에 따르면, 70-80년대 기독교 사회 운동은 NCCK를 중심으로, 크리스챤 아카데미, 기독자교수협의회, 목요기도회, EYC, KSCF 등 기독교 조직과 협력해 민주화 투쟁이 전개됐다.

이 대목에서, 논찬자인 고지수 박사는 ‘한국 사회 운동의 중심축이 엘리트에서 대중으로 전환 된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역할’을 질문했다. 이에 그는 “한국교회는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엘리트 지식인 중심에서 대중 중심으로 확장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87년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다수의 교회와 교단, 심지어 보수적 교단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3.1운동 당시 교회가 민족 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것”처럼, “87년 6.10 항쟁은 보수교회까지 참여한 자유민주화 투쟁 이었다”고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NCCK의 ‘88선언’은 노태우 정부의 ‘7·7 통일정책선언’과 1991년 김영삼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당시 기독교 진보 세력은 남북의 평화 통일 노선을 견지했고, 주체는 민중이 돼야 함을 주장”하면서 “통일 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다”고 역설했다.

다만 그는 87년 민주항쟁 이후, 기독교 사회 운동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등 운동권 세력이 정치세력으로 집권하면서, 통일 정책의 부작용” 때문에 “보수·진보 진영의 갈등이 표면화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현재 보수와 진보는 극렬한 남남 갈등을 겪고 있고, 이는 반성할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광화문 광장에서 한기총 주최로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며 “일견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다”고 했지만,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사회참여가 엘리트 중심에서 민중의 참여로 확장되고 있다”점에서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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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기독교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증인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70-80년대 기독교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 시간이 이어졌다. 박종렬 목사는 ‘KSCF로 통합된 후, 한국 기독 학생운동(1970년)’을 증언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에서, ‘가난한 자에게 물 준 사람은 곧 예수님에게 드린 것’의 정신을 따르며 참여했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며 “당시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은 ‘대학생들이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가난한 지역으로 가야한다’는 정신을 견지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1969년 당시, 엘리트 운동권 학생들은 ‘파쇼·반민주’ 투쟁을 외쳤다”며 “그렇지만 대중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때문에 그는 “이런 식의 대중 운동 밖에는 없을까”라는 당시 의문을 전하며, “기독교 사회 운동 진영은 ‘대중들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 전환을 꾀했다”고 밝혔다. 하여 그는 “전도에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정의 실현’으로 외연을 확장했다”며 “가톨릭, YMCA 등 타 기관과 협동해, 사회 운동을 펼쳐갔다”고 강조했다.

뒤이어 권혁율 장로가 80년대 상황을 증언했다. 그는 “기독학생회(IVF 전신) 활동을 하다, 안병무 선생의 책을 읽고 ‘기독교 사회 참여’에 눈을 떴다”고 고백했다. 그가 주로 활동 했던 단체는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라고 했다. 이어 그는 “광주 5.18 민주 항쟁 이후, 기독 학생 운동은 전반적으로 확대됐고, 87년 6월 항쟁 때 정점을 찍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며 “6월 민주항쟁은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제 2의 3.1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이유로 그는 “전국적·대중적 참여에 기독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활동을 두고 “6월 항쟁에서 어른들의 논의의 장(場)인 국본과 청년들의 논의를 절충했던 지점은 바로 EYC”라고 긍정했다. 하여 그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 대해, ‘호언 철폐, 비폭력 운동’을 이끈데 기독교계가 큰 역할을 했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그는 “87년 6월 항쟁 이후, 기독교 운동의 대중 운동이 부분화 됐다”며 “농민, 노동, 교사 운동으로 부분화 돼, 그 속에 녹아 ‘밀알이 되자’고 결의했다”고 술회했다.

다만 그는 “이런 노력이후 한국 사회가 좀 더 성숙했지만, 우리 사회가 너무 극단화 된 것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아울러 그는 “기독교적 가치를 띄고, 사회 개혁의 중심적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제 1발제로 신광철 박사가 ‘한국 기독교 사회사상론의 성찰과 비전을 통하여’를, 논찬에는 김영명 박사가 수고했다. 제2발제는 하희정 박사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이 걸어온 길: 보편성과 특수성’을, 강종권 박사가 논찬에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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