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약 남용과 부작용을 줄이겠다며 의약분업 이후 12년 만에 전문약과 일반약을 재분류했다.
먹는 사전피임제의 경우 국내 도입 44년만에 전문의약품으로 전환되고, 사후피임제는 일반의약품으로 바뀌어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7일 이 같은 내용의 의약품 재분류안을 내놓으면서 사전피임제의 전문약 전환 이유에 대해 부작용과 약물상호작용 측면에서 의사의 지시와 감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재분류는 기존 의약품 분류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의약단체, 소비자단체, 언론 등의 지적에 따라 지난해 6월부터 추진했다.
식약청에 따르면 재분류 작업은 전문가, 의약단체 등의 의견과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자문을 거쳐 마련한 의약품 분류 세부기준을 따른 것으로, 투여시 의사 지시가 필요하거나 오남용 우려가 있으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전체 의약품 3만9254개 품목 중 1.3%에 해당하는 526개 품목의 분류가 바뀌었다. 일반에서 전문으로 전환이 273개 품목, 전문에서 일반으로의 전환이 212개 품목이며, 나머지 41개 품목은 전문과 일반에 모두 포함되는 동시분류로 지정했다.
일반에서 전문으로 전환된 주요 품목은 사전피임제, 어린이키미테, 우루사정200㎎, 아루사루민액, 클리다마이신·에리트로마이신 외용액제, 트리암시놀론아세토니드 0.1% 크림제 등이다. 전환 사유는 부작용 관리, 용법·용량, 약리작용 등에 의사 감독이 필요하거나 장기사용시 내성이 발생할 우려 등이다.
전문에서 일반으로 바뀐 주요 품목은 사후응급피임제, 잔탁정75㎎, 로라타딘정, 아모롤핀염산염 외용제 등이다. 식약청은 이들 품목이 부작용 발현 양상에서 특이사항이 없고, 미국 등 의약선진 8개국 중 5개국에서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한 점을 참고했다는 것이 식약청 설명이다.
이에 따라 혈전증과 편두통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사전피임약, 환각 가능성이 제기된 어린이 키미테, 담석증 전문치료용인 우루사 200mg 등 270여 개 일반약이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약으로 바뀐다.
반면 노레보 등 사후피임약과 위장약 잔탁 75mg 등 210여 개 품목은 10년 이상 써본 결과 큰 부작용이 없어, 약국에서 바로 구입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사전피임제의 경우 임신을 피하기 위해 장기간 복용하는 에티닐에스트라디올 복합제로 대개 21일간 복용하고 7일 휴약하는 주기를 반복해 복용하는데, 그동안 부작용을 사례가 빈번했다.
식약청은 "사전피임제가 국내에 처음 들어올 당시에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사전피임제를 보건소 등에서 보급하기 위해 일반약으로 분류했으나 최근 안전성 우려가 커지면서 전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후피임제는 콘돔 손상, 사전피임제 복용 누락, 성폭행 등으로 인한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고 낙태수술을 방지하기 위한 응급 조치다. 하지만 주요 성분인 레보노르게스트렐이 사전피임제보다 10~15배 높아 일상적인 피임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며 성관계 후 늦어도 72시간 내 복용해야 효과가 있다.
국내에는 2001년 첫 허가 이후 노레보정, 노레보원정, 쎄스콘원앤원정, 엠에스필정, 레보노민정, 엔티핌정, 세이프원정, 레보니아정, 레보이나원정, 포스티노-1정, 애프터원정 등이 출시돼있다.
주요 부작용은 구역, 구토, 생리주기 변화 등이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 48시간 내 사라진다. 그러나 난관염·골반염 등으로 자궁외 임신 우려가 있거나, 중증 간질환이 있는 경우는 신중한 투여가 필요하다.
식약청은 피임제의 경우 의약계, 종교계, 여성계, 시민단체 등의 의견이 엇갈려 논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는 점을 감안, 공청회 등을 통해 충분히 여론을 수렴하고 약사와 소비자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의 비율이 재분류를 하기 전과 크게 차이가 없는데다 기존에 편리하게 구입가능하던 의약품들의 접근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 재분류가 사회적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분류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현 분류상 비율을 살펴보면 전문의약품은 모두 2만2080 품목으로 전체의 56.2%를 차지하며, 일반의약품은 1만7174 품목으로 43.8%를 차지하고 있다.
식약청이 이번에 재분류한 것에 따르면, 전문의약품의 비율은 56.4%(2만2101 품목), 일반의약품은 43.6%(1만711 2품목)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비율이 기존과 대동소이하다.
비록 식약청이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15단계를 통해 의약품을 재분류했다는 입장이지만 관련 단체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분류라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피임약의 경우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전환하고 사전피임약을 전문약으로 전환하는 등 의약단체의 반발을 줄일 수 있도록 절반씩 나눠준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