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사진)은 스위스의 개혁교회 목사이며 신정통주의 신학자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해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신학생이었던 바르트는 베른 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유럽신학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 설교하지 않고 성서(성경)를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한 바르트는 한계를 느끼고,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는 비유를 듣게 되기도 한다.
자유주의와 결별한 바르트는 이후 개혁교회(Reformed) 전통에서 길을 찾고, 개혁교회 신학의 뿌리인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 및 하이델베르크 신조등의 교의를 연구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인 노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 곧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기독교 사상의 열매를 맺게 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하자 바르트는 나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으며, 나치즘이 우상숭배이며 유대인과 집시 등을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판단해 설교와 강연을 통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했다. 때문에 바르트는 독일 밖으로 영구 추방 당해 스위스 바젤 대학으로 이직할 수 밖에 없었으며, 폴 틸리히와 디트리히 본 회퍼 등이 그의 명맥을 이어갔다.
히틀러의 패망 후에는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교회교의학" "복음주의 신학입문" 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편 박 만 박사(부산장신대)는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라고 평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명제를 가지고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고 했다. 그는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복신앙과 윤리를 가르쳐 온 일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환봉 교수(고신대)는 "개혁주의에서는 칼 바르트에 대해 다르게 평가한다"고 말하고, "바르트는 에밀 브룬너와 20년간 자연신학에 대해 논쟁해 왔는데, 에밀 부룬너는 칼빈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여 자연신학을 인정했고, 칼 바르트 또한 칼빈의 입장을 잘못 이해하여 일반 계시를 부정했다"고 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