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이십대 초에 갓 결혼했을 무렵, 너무 돈이 없어서(그렇다기보다 사정상 빚을 많이 져서) 난로 한 대도 살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은 도쿄 근교의 외풍이 파고드는 몹시 추운 단독에서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부엌의 얼음이 땡땡 얼어붙었다. 우리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웠는데, 잘 때는 사람과 고양이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온기를 나눴다. 당시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집이 근처 고양이들의 커뮤니티센터 같은 장소가 되어 늘 불특정 다수의 고양이 손님이 우글거렸다. 그래서 그런 녀석들까지 끌어 안고 사람 두 명과 고양이 네다섯 마리가 뒤엉켜 잠드는 일도 있었다. 살아가기에는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그때 인간과 고양이들이 애써 자아내던 독특한 온기는 지금도 종종 생각난다. (P455)
『1Q84』로 한국과 일본에서 예고된 파란을 일으켰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난해 연말에 『잡문집』을 냈다. 해가 바뀌었지만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도서출판 비채 마케팅 담당부서는 "아무래도 소설을 중심으로 하는 하루키다 보니 소설만큼의 폭발력은 없지만 지금까지 출판된 에세이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고 말했다.
한때 '한국에서 하루키가 책을 내면 최소한 100만부는 팔린다'는 속설이 나돌 정도로 국내에 그의 고정 독자들은 많다.『1Q84』역시 최단기간 100만부를 돌파했으며(이 기록은 얼마 전 신경숙 작가의『엄마를 부탁해』가 갱신했다)이 책도 그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설날 복주머니를 풀어보는 기분을 느끼도록 책의 구성을 잡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다채로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부제는 1979~2010이다.『잡문집』은 하루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단상이 농축된 에센스다.
하루키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군조문학상 수상 소감부터 최근에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된 ‘벽과 알’이라는 연설문까지. 이 책에는 수필, 영화 서평부터 여행 에세이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들이 모여 있다.
특히 '벽과 알'은 하루키가 직접 영어로 작성한 수상문으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반영한 글이다. 당시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공격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그의 수상을 말렸다. 하지만 작가는 시상식에 참석해 "여기에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고 말한 바 있다.
재즈 애호가인 하루키답게 음반에 관한 감상을 적은 글들은 전문가를 능가하는 식견으로 독자들을 매료한다.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면 내가 한 모든 일들이 위로를 받는 것 같다"는 고백은 많은 독자들 또한 공감할 만하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폭넓은 주제를 참신하고 신선한 감각으로 다룬다는 특색이 있다. 책을 읽으면 책장에 머물러 있는 설렘을 직접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위스키 성지여행』에 등장한 아일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나『먼 북소리』에서 친숙하게 서술한 그리스의 거리 곳곳은 편안한 여운을 남긴다.
잡문집에 수록된 첫 글을 썼을 당시 하루키의 나이는 서른. 그동안 재즈바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가난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은 간소한 살림과 아내와 고양이 뿐이었다. 작가는 이 존재들을 통해 자신이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갈무리한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지닌 힘은 작가에게 새로운 의지가 된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이제 예순이 넘은 하루키가 집필할 소설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 꿈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소설. 그런 소설이 나에게는 ‘좋은 소설’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밖의 기준은 내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P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