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실재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하 조그련)이 남북교회 관계에서 갖고 있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조그련이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데 있어 민간 교류 창구로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때문에 조그련을 이끌어 온 지도자인 강영섭 위원장의 별세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남북교회 교류의 역사와 현재의 역할을 다시금 되짚어 보게 한다. 본지는 강영섭 위원장의 타계를 추모하는 한편, 새롭게 이어질 조그련과 한국교회의 관계를 큰 틀에서 전망하는 기획대담을 준비했다. 대담에는 강문규 선생(전 WCC 회장, 지구촌나눔운동 이사장), 서광선 박사(전 세계 YMCA 회장, 이화여대 명예교수), 오재식 박사(전 월드비전 회장)가 참여했다.
 
조그련에 대한 보수교회를 비롯한 대다수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시선은 사실 곱지만 않다. 이들은 조그련이 남북교회 교류 관계에서 상당한 역할을 해왔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들과 믿는 모양이 다르다’는 이유로 북한교회와 리더들을 싸잡아 ‘가짜교회, 가짜목사’로 성급히 판단을 내리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이와 관련, 대담자들은 은연중 내가 믿는 식의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적 폭력을 우려하며 남북교회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북한교회에 대한 선입견을, 색안경을 벗고 그들 나름의 신앙의 모양을 존중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다음은 대담 전문.
 
김진한 편집국장(이하 사회자): 강영섭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서광선 박사(이하 서): 강영섭 위원장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를 알고 나서 한참 후이다. 당시 이북에서 목회를 하셨던 나의 아버지로부터 강 위원장의 아버지 되는 강양욱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전해 들었다.
 
그의 아버지 강양욱 목사는 전쟁이 일어나기 약 2년 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즈음 북한에도 교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목사들에게 교회설립을 거의 항의하다시피 종용했다고 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공산당이 기독교를 통제하는 단체인데 이것에 교회가 들어가자니 양심에 가책이 되고 그렇다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요샛말로 왕따를 당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하셨는데, 본인이 들어가면 공산주의에 찬성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핍박을 받게 되니까 어머니가 힘들어질 수 있는 딜레마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6.25전쟁이 터졌고 그 해 10월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올 때 대동강에서 아버지의 순교당한 시체를 발견하게 되기까지, 아버지는 반공목사로 기독교연맹에 들어가지 않았다.
 
강영섭 위원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1년인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렸던 국제 기독교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 자리에 강영욱 목사의 아들이 참석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머리에 처음 떠올랐든 것은 ‘원수의 아들’이었는데, 원수의 아들과 마주앉아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상황에 굉장한 고민과 갈등을 느낀 기억이 있다.

▲ 고 강영섭 위원장의 추모 대담은 본지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대담에 참여하고 있는 오재식 박사(좌)와 강문규 선생(우).

"강영섭은 엘리트이자 철저하게 교육받은 과묵한 사람"

강문규 선생(이하 강): 1986년 WCC가 주최하여 남북대표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던 글리온회의에 참석했을 때 강영섭 위원장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만나진 못하였고, 그 이후 93년도 일본 도쿄의 한 회의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매우 과묵하였고 먼산을 바라보는 등 혼자 있는 식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거물이고 본인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직과 루마니아 대사직을 거치는 등 북한사회의 엘리트였으니 계산된 행동이었는지 몰라도 사담이 전혀 없었다. 남한 측에서 고기준 목사를 목사로 생각한 것에 비해 강 위원장은 사실 정치가로 받아들였다.
 
사실상 북에서 정치적으로 기독교연맹은 밑바닥에 위치한 형태로 영향력도 없는 단체이나 강양욱 목사 때 상당히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북한에서 기독교단체로서의 라이센스를 받아 외국에서의 구호품을 기독교연맹을 통해 받기도 하고, 일본이나 캐나다에서의 기독교 국제회의에도 자주 참석하였다. 딱 한번 사담을 한 일은, 그 양반이 우리 딸을 알게 되었는데 딸이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다면 북한에 좋은 남자가 있는데 어떠시냐고 물어와서, 내가 그러면 선을 봐야하니 남한으로 데려오라고 말하여 서로 한번 껄껄 웃은 일이 있었다.
 
오재식 박사(이하 오): 강양욱 목사가 전쟁이 나기 전 46년 기독교단체를 만들었으나 흐지부지 되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협정에 들어갔을 때 외교관들이 ‘어디 가서 예배를 드릴 곳 없습니까’라고 물어왔는데 이 때 북측이 당혹스러워했던 것 같다. 하나의 국가인데, 모든 것이 평등하다고 표방하며 자유도 있다고 말하는데, 모스크바에도 정교회가 있는 실정에서 교회가 없다고 말하려니 입장이 난처했던 것이다. 이 찰나에 강영섭 이원장이 뛰어들어서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이 있다’며 이 기독교 단체를 공식화 했던 것 같다. 북 정부에서도 이런 민감한 직에 아무나 앉힐 수 없으니 ‘너가 한다고 하면 좋다’라고 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외교관들 입장에선 교회에 ‘목사’가 당연히 있어야 하니 60년대에 평양신학교를 만들었다.
 
강박사와 마찬가지로 나도 강 위원장을 몇십년 겪었지만 말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기본훈련인 듯 했다. 그런데 평양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다른 면이었는데 그곳에선 굉장히 말이 많고 일이 잘못되면 너 그러면 안된다고 난리도 부리고 하는 식이었다고 들었다. 대조되는 성격을 듣고 나니 '아 정말 훈련을 철저히 받은 대단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그련이 가톨릭이나 불교에 비해서 활동이 확실히 보다 활발했고 여기에는 강위원장의 역할이 정말 컸다. 한편으론 그 사람이 김일성 집안 사람이고 외교관을 할 정도로 엘리트였으니 누가 함부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루는 봉수교회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강 위원장이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이 ‘세상에 하나님 밖에 없다’였다. 그 때 사람들이 자기가 절대라고 하던 때인데 거기서 ‘그런 사람 없습니다, 히틀러를 보십시오! 진시황을 보십시오!’하고 말하는데 내가 속으로 ‘김일성까지 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까지는 가지 않더라. 그는 그 정도의 힘과 리더십으로 조그련을 지킨 사람이었다. 내가 월드비전 일을 할 때 창구를 다른 단체로 하면 ‘당신 기독교인이 아니십니까?’라면서 자기와 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하기도 했었다.
 
사회자: 강 위원장이 목사로서의 종교적 역할은 우리 쪽에서 다 알 수 없지만 정치적 역할은 충분히 감당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강: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이것은 우리의 짐작일 뿐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내가 강 위원장에게 ‘목사 안수를 언제 받았는가’라고 물어보니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당신은 이 자리를 맡고 당신은 이 자리를 맡고 하는 중에 그렇게 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특히 신학교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신화 할 필요가 있어서다.
 
북에서는 72년에 성경을 프린트했다. 민영진 성서학자가 이것을 얻어와서 보여주었는데, 북한의 성경은 공동번역 카피였다. 원본에는 분명 실수가 2개 있었는데 그것이 딱 고쳐져서 프린트된 것이었다고 한다. 적당히 카피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교정보고 해서 내놓은 것이다.
 
"북한 기독교 단체는 철저하게 성경과 신학을 스터디 했다"
 

▲ 대담에 참여하고 있는 서광선 박사.

서: 언젠가 강박사인가 누구인가가 강 위원장에게 ‘공동번역을 그대로 베낀 것 아닙니까’라고 하자 거기 고기준 목사인가 강영섭 목사인가가 ‘하나님 말씀을 좀 표절을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기독교 단체를 대충 운영하지 않았다. 성경 프린트도 ‘왕’과 같은 단어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등 몇가지 단어를 북의 실정에 맞추어 바꾸었다. 또 한번은 강 위원장이 로마서 9장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민족’을 주제로 설명하는데,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본문으로 “우리는 민족을 택하겠다”고 설교했다. 그들은 적당히 나오지 않고 철저하게 스터디를 한 사람들이다.

사회자: 그들에게도 우리와는 다를지언정 그들만의 종교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오: 북에 같이 갔던 한 장로교 총회장과의 일화다. 그는 처음부터 ‘북한 교인들은 가짜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갔다. 자기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검증받으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총회장 옆에 앉았던 사람이 찬송가를 부르는데 4절까지 눈을 감고 불렀다. 총회장도 4절까지 못 외워서 보고 부르는데. 그 교인이 기도할 때는 눈물을 흘리고 하여 그의 성경책을 언뜻 보니 밑줄이 가득 그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총회장이 ‘아, 내가 마귀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일화다.
 
서: 봉수교회 예배에 가면 딱 11시 5분 전에 데리러오는데 들어가면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앉아있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그 모습이 감동적이고 그들과 이야기도 하고 싶고 포옹도 하고 싶지만 그들과 접촉할 수 없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해석해서 ‘우리와 다르니 가짜다’라고 해석하기 보다 ‘이북식은 저렇구나’라고 이해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와 다르니 가짜다’라는 자세는 곤란하다.
 
2004년 봉수교회 갔을 때 손효순 목사(봉수교회 담임)가 오순절 예배 때 설교를 하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오순절 본문을 꺼내면서 ‘이것이 바로 공산사회 아닙니까. 서로 나누고 동등하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신 아닙니까’라고 설교를 하는데, 참 제대로 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설교가 아닌가 싶다.
 
강: 남한에서 이북의 교회와 교인들을 일괄적으로 가짜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심지어 그곳에 가는 목사들도 북의 가짜 목사들을 모니터링 하러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유치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이북 목사들이 기도도 잘하고 설교 성경 본문도 기가 막히게 적절한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면 쉽게 우리가 단정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삼박자 축복보다도 더 상황에 딱 막는 메시지가 나오는데 말이다.

사회자: 조그련의 새 지도부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강: 강영섭 위원장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뉴스가 있다. 그가 신학을 공부한지 목사안수를 받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오: 북에서 정치체제가 변할수록 종교의 역할도 커질텐데 북한정권이 어떤 식으로 막는다 해도 그 추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도 커지는 지하교회를 어쩔 수 없이 감싸 안으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중요한 시대적 전환점에서 걱정되는 것은 오히려 남한 교회의 역할과 자세다.(다음편에서 계속)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 및 정리= 이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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