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깔레>(Calais)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나옵니다. 인구 12만의 그 작은 도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그곳 시 청사 앞에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 <깔레의 시민>(1889)이 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1347년, 도버해협을 건넌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1346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그 여세를 몰아 옆에 있는 작은 도시 깔레 마저 공격합니다. 깔레 시민들의 저항은 완강했습니다. 결국 갈 길 멀었던 에드워드 3세는 그곳에서 1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원군도 보급품도 다 끊긴 깔레 시민군은 마침내 항복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깔레에 발목이 잡혀 프랑스 정복에 차질을 빚게 된 에드워드 3세는 깔레를 대표하는 인사 6명을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그 책임을 묻겠다며 깔레 시민 스스로 처형 당할 6명을 선정할 것을 명했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인 깔레 시민들이 깊은 고뇌에 빠져 모두가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당시 깔레의 최고의 부호로 알려진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자진하여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자 시장인 <장데르>도 죽음을 자원하고 나섰고, 다시 부자 상인이었던 <피에르 드 위쌍>과 그의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시민 두 사람이 더 자원하면서 희생당할 6명이 모두 채워졌습니다.
처형 당일 6명의 교수형 자원자들이 통으로 된 자루 옷을 걸치고 목에는 자신이 달릴 밧줄을 건 채로 시청 앞 광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막 형을 집행하려는 마지막 순간 기적과도 같은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왕의 형집행 정지 특명이 내려지면서 그들 모두가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필리파(Philippa of Haimault)가 왕에게 선처를 호소하며 만약 저들을 처형한다면 지금 자신이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고 왕을 설득하여 마침내 형 집행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한 사건과 당시 죽음을 자원했던 깔레의 여섯 명의 인사들을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ige)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노블레스>란 닭의 벼슬을 말하고 <오블리주>란 달걀의 노른자를 가리키는데 이 두 단어가 합성하여 <닭의 사명이란 자신의 벼슬을 과시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하나의 경구,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된 것입니다. 즉 한 사회의 지도층은 남의 존경과 대접을 받고 명예를 누리는 만큼(노블레스) 남다른 도덕적 의무(오블리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깔레시는 그 6명의 고귀한 정신과 도덕성을 기리기 위해 1884년 당대 최고의 조작가로 명성이 높았던 로댕에게 기념 작품을 의뢰합니다. 로댕은 각 인물들의 영웅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포착하여 10년에 걸친 작업을 완성하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보다 현대적인 기념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호평을 듣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깔레의 시민> 12번째 에디션이 우리나라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습니다. 1999년 <로댕 갤러리>로 출범했다가 2011년 재개관한 시청역 삼성생명 빌딩에 있는 <플라토>미술관이 바로 그곳입니다. <플라토>미술관에는 가히 불후의 명작이라 할 로댕의 <지옥의 문>과 함께 <깔레의 시민>이 상설 전시되어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서울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구 사회의 오랜 도덕적 전통은 가진 자, 지도층이 더 많이 더 엄격하게 책임을 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도층일수록 더 이기적이고 더 무책임하고 초법적이고 특권적이라는데 늘 다수 보통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이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영원한 모범이신 주님의 성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가진 자들의 훈훈한 미담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대강절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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