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촌의 한 카페에서 유우성 씨를 만났다. 그는 탈북자 출신(엄밀하게 말하면 재북 화교) 서울시 공무원으로 수백 명의 탈북자 신상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는 죄목 등 11개의 국가보안법 조항 위반으로 지난 2013년 1월 구속됐다. 하지만 약 3년에 걸친 법정 싸움 끝에 자신에 대한 간첩 혐의를 벗고 대법원에서 지난달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유 씨는 배고픔 해결과 남한에서 의사가 되겠다는 목적으로 탈북해 2004년 남한으로 왔다. 대부분의 탈북자에게 그렇듯 남한 사회는 녹록치 않았다. 꿈은 컸지만 공부는 힘들었고 먹고사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막노동도 하고 좌절도 했었지만 잠시 의사의 꿈을 보류하고 최초의 탈북자 출신 서울시 공무원 특채에 합격하는 행운을 누렸다. 중국에 나와 살던 여동생을 데려오는 게 오빠의 도리라고 판단해 입국을 시켰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여동생은 2012년 가을, 제주공항을 통해 남한에 왔다.
2012년 가을. 몇 달 후면 새로운 정권에 의해 조직의 수장이 바뀌어야 하는 국정원으로서는 확실한 공로를 세워 새 정권의 눈도장을 받고 싶었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터뜨린 게 여동생을 회유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유 씨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고, 거기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세도 타고, 더구나 지난봄엔 미모의 변호사와 결혼까지 하는 보너스도 얻었다.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그에게 닥쳤던 모든 재난들이 이제는 복으로 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무죄가 되고서 당장 취직을 하려는데 거기서부터 막혔다. “지원서를 100군데 정도 넣고 면접도 50~60곳 정도 봤어요. 그 중엔 합격 통보를 받고 일을 시작하려던 곳도 몇 곳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 전날 ‘우리 회사가 당신 때문에 세무 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며 채용을 취소한 곳도 있고, 사장은 최종 승인을 했는데 직원들이 ‘그런 사람과 같이 근무하는 게 무섭다’고 반대해 물거품이 됐어요. 일을 하고 싶지만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더군다나 그를 간첩으로 조작했던 국정원이나 검찰은 사과 한 마디 없다. 오히려 외환관리법으로 보복성 기소를 하고, ‘추방’ 운운하며 여전히 살기등등 그를 위협하고 있다. 일부 탈북자들은 그를 여전히 간첩으로 확신하며 피켓 시위도 벌이고 있다.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달라진 게 뭐 있나요?” 그가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움과 함께 대신 사과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는 요즘 간첩사건 피해자들을 자주 만난다. 인혁당 사건, 납북어부 간첩 사건,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등의 피해자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준다는 것이다. 그들 중엔 40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기도,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기도, 가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서 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일은 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일은 상식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동안 비상식으로 틀어져 있던 것을 상식으로 돌려놓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대로 비상식에서 출발해 상식이었던 것을 비상식으로 돌려놓는 이상한 통일이라면 단연코 거부해야 하는 게 모든 코리안의 몫이었다.
어느 때보다 많이 ‘통일’이 외쳐지는 2015년 대한민국은, 하지만 비상식이 상식을 압도하고 있다. 통일, 안보, 법, 국가라는 이름으로 조작과 공포, 선동이 횡행하며 양심과 정의를 압사하려 하고 있다. 통일은 이 비정상을 꾸짖고 거부하고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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