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해방이후 한국기독교가 한국현대정치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윤보선을 통해서 살펴보고, 한국사회에서 실현되었던 기독교 정치사상을 조명한 논문이 발표됐다. 10일 오후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실에서 열린 '제207회 월례세미나'에서 김정회 박사(서울장신대 대학원)가 "한국기독교의 민주주의 이행연구 - 해위 윤보선을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한 것.
김정회 박사는 먼저 "초기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유형은 크게 두 전통이 있었는데 우선 교회가 문명개화와 국권회복, 독립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보고 신앙적 관점이 아닌 문명적인 관점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개화파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형성되었던 신앙유형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이들은) 초월적인 세상보다는 현세의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했다"면서 "이 흐름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부흥했던 한국교회의 저변에 나타났던 신앙유형"이라 했다.
또 김 박사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는데, "기독교를 신앙적 동기에 의해서 수용하고 순수한 신앙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려는 시도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어났던 복음적 신앙운동이 있었다"면서 "이 세상에서보다는 저 너머에 있는 내세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지향했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기독교 민족운동은 1895년의 신앙유형이 형태화 되어 나타났던 운동으로, 기독교 민족운동이 민족주의로 발전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보다는 일본에 대한 저항의 개념 속에서 나타났으며 결국 기독교 민족주의는 항일 민족주의로서 민족주의 운동의 큰 흐름과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김 박사도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우선적인 명제였던 항일독립이라는 목표가 기독교 민족주의에서도 그 어떤 과제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이었다. 독교 정신은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했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신부적(神賦的)인간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민족의 독립은 핵심과제이자 절대명제였지만 민족의 독립은 언제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다만 김 박사는 "민족이라는 전체성을 중요시했지만 개인이라는 개별성을 무시하지 않았다"면서 "기독교 민족주의는 항일과 반공의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의 호는 해위(海葦)로, 그의 가문은 갑신개화파의 일원이었으며 한국교회 초기의 기독교 가문이었다. 영국에서의 10년간 유학생활을 통해 영국식 민주주의를 체득했던 윤보선은 해방 후에 기호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했던 한민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이승만의 계보에 속했던 윤보선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거치면서 이승만과 결별한 후 야당생활을 시작해 민주당 구파에 속해 신익희와 조병옥의 뒤를 잇는 지도자로서 위치를 다졌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개헌을 통해 새롭게 바뀌어 진 의원내각제 하에서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자 윤보선은 1960년 8월 13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신파인 장면이 총리로 내정되면서 신파가 내각을 장악하자 신구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 갈등으로 말미암아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5·16 이후 민주당 구파는 민정당과 민중당을 거치며 강력한 반박정희 투쟁의 대표적인 야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윤보선은 이 과정에서 1963년과 1967년 두 번에 걸쳐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으면서 박정희의 강력한 대항마로 등장했고, 유신독재로 점철되어 가던 197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영도자로 자리매김했다.
특별히 김정회 박사는 "윤보선의 기독교 민주주의가 이론적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균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하고, "(윤보선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하면서도 공적정의를 주장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향한 복지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강제적이거나 혁명적인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부조(相互扶助)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그것은 개인의 인간화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했고, 국가는 그러한 인간화를 실현할 수 있는 공적정의를 제공해 주어야 했다. 김 박사는 윤보선이 일찍부터 정치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를 주장했었다고 설명하고, "그는 진정한 민주화의 실천이 진정한 민족애(民族愛)라고 인식했다. 윤보선은 분명히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한국 보수주의의 원류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또 "그럼에도 윤보선은 진보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 민주주의를 통해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함께 구현해 내고 있었다"면서 "그것이 보수주의자인 윤보선이 1970년대 가장 진보적인 그룹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윤보선은 1990년 7월 18일 생을 마감했다. 김정회 박사는 "공교롭게도 윤보선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에 한국의 정치와 교회 안에는 더 이상 기독교 민주주가 확산되거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잊혀졌다"고 평하고, "보선 자신이 자신의 정치적 계보를 만들지 않았던 측면도 있었고 1970년대 민주회복운동 과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었던 이유 때문"이라 설명했다.
김정회 박사는 "최근 한국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넘어서 좌·우의 이념대결로 양분되어 있는데, 이는 남북분단이 가져온 민족적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좌·우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정치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밝히고, "1970년대 그러한 군사독재와 인권이 유린되어 가던 그 시대에 정치가 모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이념적 대안이 무엇인지를 제공해 주었던 곳이 한국기독교였다"면서 "(한국기독교가) 신학적 주제를 정치철학으로 발전시킴으로서 한국사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었다"고 이야기 했다.
한편 행사에서는 김 박사의 논문 발표 외에도 윤상림 박사(연세대 대학원)가 "한국교회의 재일조선인 선교 - 동경 교회의 설립과 재일조선인 교회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