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김규진 기자] 4.19혁명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를 위한 제2차 학술심포지엄이 16일 오후 프란치스꼬 교육회관에서 "4.19혁명기록물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와 세계사적 의의"란 주제로 열렸다.
"4.19혁명의 국내적 영향과 의의"를 발표한 정해구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4.19혁명"이라 평하고, "4.19혁명 이후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와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 독재에도 불구하고 이에 저항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는데, 4.19혁명은 바로 그 출발이자 그 원천으로 작용했다"고 이야기 했다.
정해구 교수는 "4.19혁명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겨우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리고 1953년 한국전쟁의 종전으로부터 겨우 7년이 지난 시점에서 발생하고 한국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의 시점에 발생했다"면서 "제3세계의 다른 나라들의 경험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매우 빠른 시점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어느 나라보다 보다 강하게 전개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정 교수는 "4.19혁명을 계기로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핵심세력으로서 학생집단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4.19혁명의 주역으로 학생집단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거의 모든 저항세력이 분쇄된 상태에서 그들만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라며 "이후 4.19혁명은 군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연결되었는데,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세력은 학생운동으로 언제나 반독재의 최전선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싸웠다"고 했다.
더불어 "4.19혁명이 갖는 그 세 번째 의미는 4.19혁명이 광범위한 대중 참여 하에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전개되었고, 이는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배적인 양태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을 든다고 말한 정 교수는 "국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방식에 의해 그리고 다수 대중의 참여를 통해 권력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이에 항의하는 방식을 추구했다"면서 "그것은 민주화운동에 보다 많은 대중들의 지지와 참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정해구 교수는 "4.19혁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라 했다. 그는 "4.19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반대하여 정상적인 선거민주주의를 구축하고자 했다"고 말하고, "4.19혁명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후진적인 경제 현실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망 또한 보여줬다"면서 "론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은 5.16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정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부정부패 척결의 자립적 경제발전의 기대는 그 이전에 4.19혁명을 통해 제기됐던 것"이라 했다.
정 교수는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구축된 남한의 강력한 반공체제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행해진 이승만 정권의 반공독재는 기층민중 중심의 사회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통일운동의 전개를 어렵게 만들었지만, 419혁명 직후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분출됐다"면서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추구할 중요한 목표를 보여줬다"고 했다. 그는 4.19혁명이 민주주의 발전에 극히 부정적인 역사적 조건을 가졌던 한국에서 이후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비약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루어낸 시민혁명의 출발이라 평가하며 발표를 마무리 했다.
한편 행사에서는 정 교수의 발표 외에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4·19혁명 기록물의 종류와 내용"(이창언) "4·19혁명의 국제적 영향과 의의"(오유석) 등의 발표가 있었으며, 패널들과의 종합토론의 시간도 마련됐다. 행사를 주최한 '4.19혁명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1. 4·19혁명 기록물을 집대성하고 그 세계사적 의의를 정립하여 4․19혁명의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다양하고 심층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이번 행사 개최 배경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