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집회였던 퀴어축제가 6월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데 이어 지난 5일 오후 대구 동성로에서도 열렸다. 이번에 서울에서 열린 퀴어축제가 16회째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이번 퀴어축제는 더욱 공개적이고 대담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퀴어축제를 경험한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 퀴어축제가 전달하고자하는 사상이나 가치를 이해하기보다는 퀴어축제 현장에서 있던 기괴한 옷차림이나 반나체의 야한 의상 그리고 여성의 성기를 그대로 드러낸 사진과 그림에 색칠을 하고 여성과 남성 성기 모양의 과자를 팔던 '보지파티'와 같은 홍보부스에 대한 비난과 우려가 주를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대중의 반응은 축제 주최측 입장에서 볼 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른바, '노이즈마케팅' 효과를 통해, 대중을 그동안의 무관심에서, 최소한 소통의 장으로 이끌어냈다는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통의 장에 입장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비판적인 목소리에 대응한 호모마니아의 변명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부터 대중의 비판에 대한 호모마니아의 해명과 그 해명이 변명에 불과한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현장에서 또는 온라인을 통해 퀴어축제를 접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퀴어축제도 좋지만, 꼭 야한 옷차림으로 축제를 해야 하는가?'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호모마니아의 해명은 '야한 옷차림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다. 그들은 온라인상에 돌아다니는 반나체 야한 의상의 축제참석자들과 남성의 성기를 형상화한 '음란부채', 여성의 성기를 형상화한 '보지풀빵' 등으로 대변되는 외설적 축제용품들은 현장에서 찾아보기도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달리 이는 현장을 찾은 사람들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천 명의 정상인들 속에 단 한 명만 엉덩이가 보이는 속옷차림으로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그 한 사람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대중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호모마니아들은 축제현장의 그 '기괴한' 소수가 퀴어축제가 전달하고자하는 가치와 사상을 훼손하는 무리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소수에 불과하다'는 변명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은 분명 퀴어축제의 정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이다.
퀴어축제 현장에서 전신망사옷 패션을 선보였던 한 참석자는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자신의 행동이 퀴어축제가 추구하는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호모마니아들이 과연 '다양성'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크게,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과 공동체의 협력과 조화를 존중하는 가치관이 존재한다. 그리고 서양에 비해 동양에서는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하는 가치관이 더욱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경우, 외세의 침략과 민족 간 내분이라는 국가적 시련 이겨내는 과정에서 더욱 공동체 중심의 사고체계가 강화되었다. 그런 전통과 문화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욕구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행동은 당연히 대다수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불편함 또한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의미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호모마니아야말로 동성애에 대한 일반인들의 불편함을 '혐오'라는 자신들만의 판단, 정죄의 틀에 가두고 동성애에 대한 대중들의 다양한 감정과 의견을 법으로 통제하려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다양성을 추구하는 정신에 걸맞는 태도인가 묻고 싶다. 호모마니아들이 말하는 다양성은 '그들만의 다양성'이자, '통제된 다양성'일 뿐이다.
또한 호모마니아들은 동성애자들이 단 하루 이런 축제를 한다고 해서 이성애자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더 나아가 동성애를 합법화하거나 동성결혼을 허용해도 이성애자의 삶에 변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떻게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행동이 서로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지독한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방한 구석에 처박혀 먹고 자는 히키코모리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쓸쓸이 죽어가는 독거노인도 그 존재만으로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영향을 준다. 사회는 독립된 개개인의 집합체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단 하루(실제로는 전국을 순회하며 수차례 벌어진다.) 벌어지는 축제일지라도 그 상징성과 그 후속행사들과의 연계성을 고려하면 사회에 미치는 그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호모마니아들이 이런 축제를 오랫동안 기획하고, 메르스 전염병이 퍼지던 말던 끝까지 강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동성애 법제화의 무해성 주장은, 고장난 축음기의 음악소리처럼 무한반복하는 '동성애 선천성'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성애자가 '선천적인 동성애'에 영향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그릇된 전제 하에서 전개되는 무해성 논리에 대한 반박은, 동성애교육을 통한 청소년의 동성애 학습, 에이즈의 증가, 다른 반인륜적 성애의 합법화 등등...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입이 아프고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아플 정도이다.
사실, 전에나 지금이나, 호모마니아들은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차피, 퀴어축제의 역사 자체가 다수를 향한 끊임없는 저항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지 대중과 화합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이렇게 상대의 이해를 구하거나 소통을 원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동성애 아젠다를 대하는 대중의 피로도는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인의 부정부패와 비리가 반복된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인을 감시하는 것과 정치참여를 포기해선 안되듯이, 호모마니아들의 비상식적 행동이 일상화되더라도, 이에 지치지말고 더욱 냉정하게 지켜보며 견제해야한다.
그리고 호모마니아들도 무작정 서구의 동성애운동을 모방하며, 반복되는 구차한 변명들은 집어치우고, 좀더 대중들과 소통하고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등을 돌리는 여론을 돌이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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