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 이슬람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할 때 흔히 무슬림들이 써 놓은 책들을 읽는다든지 혹은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은 이슬람 사원을 찾아가서 직접 무슬림 학자들을 만나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한다. 그런데 이슬람의 학자나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소개하는 이슬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무슬림들이 테러범은 아니지만 현재 지구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부분의 테러는 무슬림들이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칭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은 미화된 이슬람의 홍보에 속아서 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슬람의 실제 모습을 알면서도 속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왜냐하면 필자는 이슬람권에서 근 20년간 살면서 그들의 신문 방송 기사들을 직접 접해 왔으며, 현지 이슬람 성직자들의 설교나 강연들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현지어로 방송할 때 말하는 것과 외국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방송할 때는 그 내용이 확연히 달라진다.
필자의 지인 중에 이슬람권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이슬람 신앙에 심취되어 꾸란을 외우며 어린이들의 신앙 선생이 되어 학교나 동네 또는 모스크에서 어린 이맘(이슬람 성직자)으로 알려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친구가 있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주민들을 기도로 초청하는 소리)이 어린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되어 동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스크에 기도하러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그의 행복이요 영광이었다. 알라를 위한 그의 충성심은 어른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으며 그는 결국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이슬람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입학해 보니 거기서 가르치는 것은 지금까지 배우던 평화적 이슬람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자신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며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했고 점령지 여인들을 성노예로 삼고... 도저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만행들을 저지르며 그들의 우상을 파괴하고 칼로 이슬람을 확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문적으로 무함마드의 생애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강의내용은 꾸란과 하디스를 찾아 확인해 보니 모두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절대로 인류의 모델이 될 수 없고 자신이 존경할 수도 없고 믿고 따를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결국 오랜 방황 끝에 기독교인들의 성경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고 성경을 읽고 스스로 교회에 찾아가서 개종을 선언하고 그 후 핍박을 견디다 못해 도피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그 추악한 진실을 알면서도 왜 입을 다물고 침묵하며 그들과 타협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슬람을 떠나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과 지위를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샤리아(이슬람율법)에 의해서 자신을 죽이려는 수많은 충성된 무슬림들의 공격목표가 되어버린다는 현실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꾸란에 보면 종교는 강제로 하면 안 된다고 하고(꾸란2:256) 무함마드는 오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이라(꾸란42:48)는 구절이 존재하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꾸란에는 여러 차례 무함마드의 임무는 오직 메시지의 전달자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꾸란13:40, 3:20등) 이 구절들에는 "인나마(innama)"라는 제한적 단어가 붙어 있다. "전달자"라는 그의 사명,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다른 사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평화주의 무슬림"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꾸란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평화를 부인하고 왜곡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이슬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이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그 임무를 다했다고 꾸란을 들먹이며 설명할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꾸란은 그 유명한 "취소(Mansukh)교리"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꾸란2장 106절을 근거로 한다.
어떤 꾸란의 구절을 취소하거나 망각케 할 때마다 우리는 더 나은 또는 그와 동등한 구절을 내려 보내느니라. 알라께서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너희는 모르느냐?(꾸란2:106)
무함마드가 오직 알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명만을 받은 자라고 계속 강조하다가 상황이 바뀌어 메디나의 최고 통치자가 되고 군사적인 힘과 정치적 힘이 생기자 "오직 메시지 전달만을 하는 자"라는 구절은 취소되고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를 죽이라(꾸란9:5)는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이제 오직 알라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하는 사명을 가진 자로 자처하던 그가 칼의 계시가 내려왔다고 하면서 대학살을 명하는 자가 된 것이다.
신성한 달이 지나면 이교도들을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 그들을 사로잡고 포위하고 복병하라. 그러나 회개하고 이슬람식 기도를 하고 이슬람 세를 내면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라. 실로 알라는 잘 용서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라.(꾸란9:5)
그러므로 꾸란을 번역할 때 이미 취소된 구절들은 각주를 통해서 취소되었음을 밝혀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꾸란 번역본들을 봐도 그런 예의를 갖춘 것을 본 일이 없다.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살인을 명하는 마당인데, 그들에게 예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슬람의 취소 교리에 의해서 이미 취소된 구절들에 매달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속고 있는 사람들이 눈을 떠 이슬람의 정체를 바로 알고 스스로 떠나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쓴다.
/한국이란인교회(www.4him.or.kr)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임을 밝힙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