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달 23일 경기도 안양시 안양감리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제51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사사도행전의 주제와 구조에 관한 고찰 - 하나님의 나라와 주 기독론을 중심으로 -'를 주제로 발표한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 장석조 박사의 발제논문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I. 서 론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통일성에 대한 찬반토론은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찬성하는 학자들도 누가-행전의 통일된 주제에 관해서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연구들 중에서 사도행전의 주제를 구조와 연 결해서 다룬 것은 두 개의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견해에 따르면, 사도행전의 주제는 '말씀의 성장'이다. William H. Malas는 사도행전의 문학적 구조에 대한 연구사와 그에 대한 평가를 보여주면서 요약 구절들에 기초하여 전체 구조를 보여준다. R. N. Longenecker는 사도행전의 요약 구절들(6:7a; 12:24; 19:20)에 기초하여 '말씀의 성장' 주제로 사도행전의 구조를 보여준다. 둘째 견해에 따르면, 사도행전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A. R. C. Leaney는 '하나님의 나라'와 '왕 되신 그리스도'를 누가복음의 주제로 제안했다. I. H. Marshall은 Leaney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나라' 단어군과 '구원' 단어군에 대한 통계적 자료에 근거하여 '구원'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포괄하는 주제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파슨스(Parsons)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러티 브플롯 전개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나라'(h' basilei,a tou/ qeou/)가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사도행전에 겨우 8회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행 1:3, 6; 8:12; 14:22; 19:8; 20:25; 28:23, 31), 서두(행 1:3,6)와 결미(행 28:23, 31)에 각각 2회 나타나는 것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사도행전의 주제를 제시했다.
이상의 두 견해는 사도행전의 주제를 사도행전의 구조에 근거하여 제시하여 좋은 결과를 도 출해냈다. 하지만 그들은 사도행전 구조의 중요한 근거인 요약구절 '말씀의 성장'(6:7; 12:24; 19:20)이 마지막 요약구절이 될 결론 자리에서 생략되고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합'(28:31)으로 대체되고 있는 점에 부주의했다. 물론 박형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행전의 서두와 결미에서 사도행전의 구조를 세워주는 것을 언급하고 그것을 요약 구절들인 '말씀의 성장'(6:7; 12:24; 19:20)과 연결되는 것을 바르게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말씀의 성장'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시키는데 집중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28:31)에만 연결할 뿐이다. 오히려 그는 사도행전 구조의 주요 기준으로 '말씀의 성장'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시작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의 의도는 이 두 기준에 기초하여 사도행전의 구조를 보여주며(1:1-3; 1:4-6:7상; 6:7하-12:24; 12:25-19:20; 19:21-28:31), 예루살렘교회가 변질되어가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더 성장하는 주제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주제는 요약 구절들인 '말씀의 성장'(6:7; 12:24; 19:20)으로 제시될 수도 있고 수미쌍관(inclusio) 구조에 나타난 대로(1:6; 28:31)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 도'의 통합 개념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주제를 사도행전의 구조를 보여주는 두 가지 구조적 요소들로 표현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구조적 요소들은 '말씀의 성장', '하나님의 나라', '주 예수 그리스도' 등 세 가지 주제들을 담고 있다. 본 소고에서 필자는 사도행전의 구조와 그 구조의 기준인 요약구절들과 '하나님의 나라'와 주 기독론의 분포를 다음의 <표>와 같이 보여주고,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사도행전의 네 개의 단원에서 의미하는가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여 사도행전의 구조 속에서 그 주제를 보다 명확히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행전의 세 가지 주제들은 누가복음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복음에 많이 사용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사도행전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에 주 기독론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비슷하게 분포되어 있는데, 그 이유 또한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모든 문제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언급되는 본문을 중심으로 각 단원을 주해하고, 이어서 주 기독론과 '말씀 의 성장'도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사도행전의 주제가 사도행전의 구조를 보여주는 각 단원의 결론에서 '말씀의 성장'(6:7; 12:24; 19:20)으로 요약, 암시되고 또 다른 구조적 요소인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은 각 단원들과 특히 주제를 제시하는 서 두(1:6)와 주제를 명시하는 결미(28:31)에서 그 말씀의 두 가지 핵심내용들로 명시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II.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와 기능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h' basilei,a tou/ qeou/)는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매우 적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행 1:3, 6; 8:12; 14:22; 19:8; 20:25; 28:23, 31). 하지만 <표>에서와 같이 그 것은 사도행전의 각 단원에 모두 분포되어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며, 누가복음에 많이 나타나고 사도행전에는 드물게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1. 사도행전 1:1-6:7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사도행전의 1단원(1:1-6:7)은 '하나님의 나라'(1:3, 6)를 두 번씩 언급하며 도입되고 '말씀의 성장'(1:1-6:7)으로 마친다. 첫 언급은 사도행전 서문의 첫 단락(1:1-5)에서 사도행전의 주제를 명시하기보다는 먼저 기록한 누가복음을 요약하고 명시해준다. 누가는 서문에서 주제 명시를 위 해 두 개의 περί 전치사구들을 사용한다. 첫째 περί 전치사구(모든 것들에 관하여, περὶ πάντω ν)는 누가복음을 요약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적 장치로서 예수님이 승천 이전까지 지상에서 성 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들과 가르치신 말씀들을 도입한다(행 1:1-2). 누가는 누가복음의 요약을 둘째 περί 전치사구로 다시 요약하며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들)"(τὰ περὶ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을 주제화한다(행 1:3).
사도행전의 첫 단락에서 사도행전의 주제가 언급되어야 하는데, 누가복음의 주제가 "하나님 의 나라에 관한 일(들)"(τὰ περὶ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로 명시되었다면(행 1:3), 사도행전의 주제도 누가복음의 주제와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나라"로 제시하려는 것이 누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1절에서 번역되지 않은 μέν(멘, 한편)도 생략된 δέ(데, 반면)를 예고하면서 누가복음의 주제 가 사도행전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에서 기록된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가 사도행전의 실제적 주제로 도입되는 구절은 사도행전 1장 6절이다. 두 번째 언급된 "하나님의 나라"(h' basilei,a)는 사도행전의 주제로 명시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것은 서문 의 둘째 단락을 시작하는 제자들의 질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개역개정을 포함하여 많은 한국어 번역 성경들에서 1장 6절은 잘못 번역되었다.
개역개정 1:6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원문 Ku,rie (eiv evn tw/| cro,nw| tou,tw| avpokaqista,neij th.n basilei,an tw/| VIsrah,lÈ 사역 "주여, 당신은 이 때에 이스라엘에 그(하나님의)나라를 회복하실 것입니까?"
유상섭이 바르게 지적했듯이, 개역개정 등 많은 번역본들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 아볼 수 없게 번역했다. 이 번역본들에서는 사도들이 마치 하나님나라의 회복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단 지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사도들이 1세 기 유대교의 주류였던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에 물들어 있는 것을 교정하시려고 고난과 죽음과 부활 의 길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교육을 다시 받은 (행 1:1-3) 후에도 여전히 민족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추구했을까? 사도들은 부활 후 승천사이에 40일간 집중적으로 재교육을 받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여전히 오해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무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표적인 부활의 주님을 대면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했을 것이고(행 1:3; 눅 9:22, 44), 단지 그것이 늘 그래왔듯이(눅 17:20-22; 19:11-27; 24:21)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회복될 것이 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도들의 질문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여전히 잘못된 이해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이 아닐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서 잘못된 두 가지 부분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신다. 예수님 의 첫 교정은 하나님나라의 회복의 때가 '이 때"다는 사도들의 확신과 소망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확신과 대조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7절에서 종말의 임박 분위기를 깨려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선포해 오신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눅 4:21; 19:9-11)을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기대로 충만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예수님은 단지 사도들이 지나치게 실현된 종말론에 빠져들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미래적 완성을 준비하는데 충실 하도록 종말론적 긴장을 유지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 교정은 하나님나라의 회복 영역을 "이스라엘에" 한정시키려는 사도들의 잘못에 관한 것 이다. 그렇다고 8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회복 영역에서 민족적 이스라엘을 배제하려는 것은 아니다.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는 민족적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땅 끝"(e[wj evsca,tou th/j gh/j)의 모든 민족들을 포괄하는 만물의 회복을 가리킨다. 사도들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종말론적 긴장 기간에 예수님과 같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눅 4:14, 18; 24:47) 세상 모든 민족들 에게 예수님이 "주"이심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배운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복음의 '하나님 나 라'를 전제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시면서(눅 4:14-9:50) "하나님 의 나라를 복음으로 전파하"는 것이 그의 사명임을 명시하셨다(눅 4:43). 여기서 "복음으로 전파함"은 4장 18절에 인용한 이사야 61장을 상기시킨다. 하나님나라의 우선적인 수혜 대상자는 '가난한 자'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눅 4:21; 6:20)은 구약에 모형론적으로 나타나고(눅 4:25-27) 누가복음에 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침(눅 4:14-21)과 환자 치료와 부정한 귀신 나감(눅 4:36-44)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어디서도 예수님이 민족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위하여 가르치거나 행동 하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도들은 부활 후 승천사이에 40일간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과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 라에 관한 것이라고 재교육을 받아왔다(행 1:1-3).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나라 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전혀 무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표적 인 부활의 주님을 대면하면서 늘 그래왔듯이(눅 17:20-22; 19:11-27; 24:21)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종말의 하나님나라를 예루살렘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눅19:11, 28; 행1:4, 6). 누가 신학에서 지정학적 장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시작하고(1:9) 거기서 마친다(24:53). 누가복음의 구조에 따라 중심부분인 예루살렘 여행기사도 예루살렘으로 시작하고(9:51) 마친다(19:27). 예루살렘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이어주는 중요한 지정학적 역할로써 신학 적 의의를 전달한다(눅 24:47; 행 1:4, 8; 5:28).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하게 연결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왕이신 것을 선포하며 예루살렘 성에 오르셔서 통치하실 것이고(사 40:9-10; 52:1-8; 60-62장) 특별히 그 보좌인 성전에 좌정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충만케 하실 것이다(사 6:1-13). 이사야서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 장소는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종말론적인 통치의 보좌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2절을 인용하실 때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삭제함으로써 그가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특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19절에서 이사야 61:2을 인용하면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며"에 멈추고 "보복의 날"(34:8; 63:4) 등 그 이하를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그렇다고 누가는 예수께서 이사야의 문맥을 무시하고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며 의의 심판을 제외했다고 보지 않는다. 키드너는 예수가 "신원의 날"을 후반부에 성취될 내용으로 연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눅 6:24-26; 행 2:35; 3:23; 17:21; 마 25:31-46).
이와 같이 본 단원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나라를 두 번 밖에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의미, 특 현재적 선취와 미래적 완성은 전제되어 있다. 베드로의 복음 사역은 예수님 의 복음 사역, 즉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침(눅 4:14-21)과 환자 치료와 부정한 귀신 나감 등 표적 행 함(눅 4:36-44)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디서도 예수님이 민족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위하여 가르치거나 행동하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성취되어진다.
2. 사도행전의 다른 단원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누가는 사도행전의 제2단원(6:8-12:24)에서 '하나님의 나라'(8:12)를 언급하고 '말씀의 성장' 으로 마친다. 사마리아에 전파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1장 8절의 프로그램인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한 복음여행길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또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 사역에서 사마리아를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을 상기시킨다. 마태복음(10:5)과 대조적으로 누가복음(9:52)에서 사마리아는 복음수혜의 대상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호의를 거절한다. 제자들은 호의를 거절하는 사마리아에 매우 적대적으로 반응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렛에 서 가졌던 하나님나라의 구원의 은혜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은 히브리파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그 사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 누가는 여기서도 1장 6절에 나타난 사도들의 미성숙을 상기시키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2단원에서 히브리파 사도들은 헬라파 지도자들이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사역을 인준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연합하는 영적 새 이스라엘을 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빌립은 예루살렘교회의 헬라파 지도자로서 흩어진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23) 하지만 빌립이 가르친 말들과 행한 표적들(행 8:4-13)을 통해 전한 복음도 '하나님의 나라'로 요약된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가-행전의 구조적 통일성을 위해 사용할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를 위해 전파 된 빌립의 복음이 예수님의 복음(눅 4:14-21, 4:36-44)과 사도행전 제1단원에 나타난 베드로의 복음(행 1:1-6:7)과 일관성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 하나의 복음만이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구 성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단원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가 히브리파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는 전승의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면, 2단원에서는 그 전승의 복음은 유대인에 집착하는 히브리파 사도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사마리아인들과 이디오피아 내시(8:26, 35)나 헬라인(11:20) 등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헬라파 지도자 빌립에 의해 시작되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제3단원(12:25-19:20)에서 '하나님의 나라'(14:22; 19:8)를 두 번 언급한 다. 루스드라나 에베소에 전파된 '하나님의 나라' 복음도 1장 8절의 복음 프로그램인 땅 끝을 향한 여행길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기능을 한다. 특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행19:20) 또한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대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에 참여함 (눅 4, 13, 14장)을 상기시킨다. 14장 22절의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미래의 하나님 나라로서 고난을 통과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제3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둘 다 모두 고난을 통과하는 문맥에 놓여 있다. 누가는 복음의 말씀이 뿌려지고 성장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이 이루어짐을 의도했다.
사도행전의 넷째 대단원(19:21-28:31)은 바울에 의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나라'(20:25; 28:23, 31)를 세 번 포함한다.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울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공평하게 전파되는 복음의 내용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가까이 제3단원에서 강조된 대로(행19:10), 멀리는 제 1단원의 서론적 프로그램(1:8)의 '땅 끝'이 함축하는 대로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복음, 즉 전승의 복 음으로서 기능하며 그 전승의 복음이 땅 끝 이방인에게까지 일관적으로 전파되었고 그러므로 세계의 모든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회임을 보여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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