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신반포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9회 <샬롬나비 토마토시민강좌>에서 발제한 총신대학교 이상원 교수의 '자살과 기독교 신앙'을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I. 자살의 정의
자살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도적으로 죽음의 위협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거나, 죽음의 위협이 다가 올 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의 선결조건은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자살이 이루어지는 경우입니다. 자유로운 결단이 불가능한 상황 (심한 정신질환이나 치매)에서 행하는 경우는 일차적으로 질병의 치료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 접근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 비로소 윤리적인 관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거의 대부분의 자살이 정신질환의 상태에서 결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다가 올 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는 경우는 행위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통상적인 자살행위로 분류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순교) 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 (강재구 소령, 구명보트의 군목, 전쟁 시 동료들과 국민을 위하여 싸우는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념 실현을 위하거나(전태일의 죽음), 순결을 지키기 위하거나(이조시대의 은장도),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한 자살의 경우 등과 같이 인간의 생명의 가치 보다 열등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II. 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는 자살예찬론이 우세를 보여주는 가운데 자살비판론이 끊임없는 논쟁을 해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고대 희랍신화에서는 대체로 자살이 예찬되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살을 신의 분노를 촉발하는 행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도시국가)에 대항하는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금지했습니다.
스토아 학파(규범으로부터의 자유)와 에피큐로스 학파(쾌락을 보장해 주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영혼과 육체의 소멸)에서는 자살을 비판할 근거가 없었고 오히려 자살을 예찬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몽테스키외, 루소, 흄, 괴테, 쇼펜하우어, 니체 등은 자결권의 차원에서 자살 옹호한 반면에 칸트는 자연법과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자살 비판했습니다.
III. 뒤르껭과 프로이드
20세기에 들어와서 자살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사람은 프로이트와 뒤르껭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에게는 삶에의 충동과 죽음에의 충동이 공존한다고 보았고, 이 충동은 윤리적 결단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능가하여 나타나면 인간이 자살을 결행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삶에의 충동은 본능적인 충동이지만, 죽음에의 충동은 본능적이 아니며 외부에서 들어온 침입자에 불과합니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거나 강렬한 것은 아닙니다.
한편 뒤르껭은 사회학적 요인들이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영향력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이라고 보고 사회학적 요인들에 의하여 자살을 하는 경우는 자살을 결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뒤르껭은 사회학적 요인들에 의하여 촉발되는 자살의 유형으로서 세 가지를 열거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이기적 자살입니다. 이기적 자살이란 사회와의 통합의식 지나치게 약화될 때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집단 따돌림이 있을 때 자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집단 따돌림이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집단으로부터의 소외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창조적 자기계발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둘째 유형은 이타적 자살입니다. 이타적 자살은 집단과의 통합의식 지나치게 강화되었을 때 집단을 위하여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입니다. 2차대전 시의 일본군의 가미가제 특공대나 9.11자살테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까지 희생할 정도로 강한 집단귀속의식은 보편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셋째 유형은 도덕이나 규범 등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군급한 상황에 몰렸을 때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너무 많은 카드빚 등을 지게 되었을 때 자살로써 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상황 속에서 삶에의 의지를 더 불태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프로이드와 뒤르껭을 읽으면서 자살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인 원인들과 사회학적인 원인들을 찾아서 해소시킴으로써 자살을 예방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런 원인들이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결정론적인 원인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IV. 교회사적 관점에서 본 자살
철학사의 경우와는 달리 교회사를 검토해 보면 자살을 윤리적으로 허용한 경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교부들은 모두 자살을 비판했습니다. 중세시대에 들어와서 자살에 대한 비판이 지나칠 정도로 강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급기야 867년에 니콜라스1세가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세시대의 자살관의 특징은 자살행위를 구원의 문제와 직결시켰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살을 결행했다면 비록 세례받은 성도들이라 할찌라도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단테는 자살자를 지옥의 맨 밑바닥에 위치시킴으로써 특히 자살을 혐오했던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살을 윤리적으로 비판했으나 자살을 구원문제와 연결시키지는 않았습니다.
1. 루터는 명백히 자살을 구원문제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명백히 반대했습니다.
2. 칼빈은 자살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나 성령 훼방죄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3. 퍼킨스는 자살자는 원래의 자기 모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며, 자살을 결행하는 순간에 회개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과 긍휼의 무한한 깊이를 강조했습니다.
V. 성경의 사례들
1. 삼손이 다곤신당을 무너뜨리고 자결한 경우는 이스라엘 민족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전쟁행위입니다. 따라서 삼손은 조국의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한 순국의 행위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비판할 수 없습니다.
2. 사울이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자기 칼에 엎드려 자결한 경우는 하나님의 백성의 시신이 이방인들에 의하여 모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행한 전쟁 중의 행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울이 자살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고 다만 사울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음을 강조합니다.
3. 압살롬의 책사 아히도벨의 경우는 명확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히도벨의 자결에 대하여 어떤 규범적 평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히도벨이 아비 묘에 장사되었다는 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결한 아히도벨도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히도벨의 생애는 물론 실수가 있긴 했지만 하나님의 선한 종으로 살아온 생애였습니다. 한 가지 실수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나타난 기여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4. 가룟 유다의 경우는 명백하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입니다. "제 곳으로 갔다"는 표현은 지옥을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지옥에 간 것은 자살 이전에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VI. 자살비판의 규범적 근거들
1. 성경은 자살에 대하여 별도로 언급하거나 평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성경이 자살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죽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자살과 타살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자살은 분명히 살인행위입니다.
2. 인간의 생명의 종결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자살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탈취하는 행위입니다.
3. 사후에 심판이 있고 내세가 있다는 종말관은 자살에 대한 강력한 제동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4. 자살은 창조질서를 거스리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삶에의 충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본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행동인 반면에 죽음에의 충동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5. 자살은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는 행동입니다. 자살하는 자는 자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의 구성원들에게 끼칠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만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아가페 사랑의 태도를 견지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황금률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자살을 하도록 유도한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참아내고 자살을 결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6.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면 그 고통 안에는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신학적 확신은 자살에의 충동을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7. 자살한 기독교인의 구원의 문제.
ㄱ. 자살한 자는 비록 신앙을 고백한 신자라 할지라도 받은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생각은 성경에 근거한 사상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이교도들에게서 기원한 사상이 중세시대에 가톨릭교회 안에 스며들어온 것입니다.
ㄴ. 자살은 고의적 살인의 경우와는 달리 정신적으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결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윤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에 앞서서 정신질환치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ㄷ. 한 순간의 실수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닙니다. 예컨대 다윗이 밧세바를 탈취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든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아주 비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행위는 자살보다 훨씬 악한 행위로서 만일 이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다윗을 평가한다면 다윗은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보시고 이런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다윗을 견인의 은혜로서 시종일관 붙드셨습니다.
ㄹ. 구원의 근거는 실존적으로 범한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룩하신 의로움만이 유일한 근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미사일 등에 맞아서 갑자기 생명이 종결되는 경우에 그가 생전에 행했던 특정한 죄를 모두 다 내어 놓고 회개할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억의 한계 때문에 생각해낼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하는 사람이 회개를 하지 못한다는 판단도 근거가 희박한 생각입니다. 회개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예수님과 십자가 위에 매달렸던 강도들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한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예수님은 진정한 회개의 신앙고백으로 인정해 주셨고, 은혜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인간 편에서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가능합니다.
ㅁ.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선언은 특히 청소년들과 일부 성도들에게 교육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를 훼손시켜 가면서까지 교육효과를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교육효과는 구원의 진리의 터전 위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 속한 교회들에서 하는 것처럼 행위구원론이나 윤리주의로 나아가면 성도들의 생활교육효과는 확실하게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방법론이 구원의 진리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고 교회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는 바울이 그랬듯이 반율법주의 혹은 무율법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믿음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 터전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야 할 성화된 삶을 철저하게 강조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이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예 행위구원론이나 윤리주의로 치중하든지, 아니면 성화의 불필요함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이신 칭의 주장으로 나아가서 편안하게 안착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길은 개혁주의가 나아갈 길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