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칼빈은 중세교회의 제도화되고 미신화된 성례전적 교회와 신학에 성령론을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매체로서 교회와 신학의 골격에 피를 공급하는 생기(生氣)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정립하였고, 웨슬리는 성령의 생동적 역사로써 의식(儀式)으로 경직화된 영국 성공회와 도덕과 윤리가 해이된 18세기 영국사회에 도덕적 개혁을 가져왔고, 틸리케는 나치정권에 굴복한 독일 국가교회에 복음과 성직자의 양심을 보여주었고 교회개혁과 교의학 정립에 성령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I. 16세기 칼빈의 개혁과 성령
칼빈은 성경의 권위를 신앙의 유일한 지침으로 높인 말씀의 신학자일 뿐아니라 구프린스턴 신학자 워필드가 지적한 바같이 성령의 권위와 역사를 강조한 "성령의 신학자"였다. 중세교회의 신학이 성례전 의식에 신비주의적으로 구원과 은총을 접목시키는 교회제도적 성례전주의에 치중한 데 반하여 칼빈은 루터를 따라서 믿음과 칭의와 성화라는 구원의 서정을 믿음 행위에 의하여 수행되는 내면적 과정으로 보았으며 이 믿음 행위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작품임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루터의 오로지 신앙의 신학을 성령론으로 뒷받침하면서 루터가 강조한 성부의 예정과 성자의 대속을 성령의 적용 사역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설명하였다.
칼빈이 성령의 신학자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주권적으로 구원을 적용하는 저자라는 적합한 호칭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장악하여 행사하고 있던 구원의 적용이라는 권세가 모순임을 적발하고 지적하였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주권 하에 있으며, 그 구체적 적용 사역들은 교회를 통해서 성직자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가운데 주권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II. 18세기 웨슬리의 개혁과 성령
영국 성공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시절 신성그룹을 만들어 경건과 구제에 힘쓰고 인디안 선교를 위하여 미국 조지아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패를 경험하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 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 다 신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 진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이 없었다." "나는 인도인(아메리카)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 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 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한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 상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리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儀式)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리 개혁운동은 18세기 영국에 일어난 새로운 성령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는 그의 목회와 부흥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우리의 속죄요, 우리의 삶이신 그리스도에게 안식(쉼)하는 것인데,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고 했다. 웨슬리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때문으로, 성령의 사역 없이 기독교 메시지는 단지 이론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인식은 "루터의 인식에 대한 논리적 적용으로, 그래서 감리회는 종교개혁의 연장"이다
웨슬리는 회심한지 18일 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의 회심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 만큼 그의 회심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의 신앙체험은 회심의 경험에서 그치지 않았다. 웨슬레는 신자 속에 남아있는 내적인 죄성을 발견하였고 그 내적 죄성을 정결케 하시는 성결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한 번도 새로운 교회나 어떤 종류의 특정한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메토디즘(Methodism)이라는 것이 어떤 새로운 종파가 아니라 "옛 종교요, 성경의 종교요, 초대교회의 종교요, 영국교회의 종교이다."라고 말하면서 '메토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는 어떤 특별하고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성경적이고 사도적이며 초대교회적이고 보편적이고 평범한 기독교 신앙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지키는 동시에 신앙의 본질이 되는 주제들의 조화와 균형을 지키면서, 신학적 견해에 있어서는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일치와 협력 정신을 강조했다"고 평가하고, "더 나아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논쟁과 갈등, 경쟁과 불화를 거부하고 모든 면에서 대화와 이해와 조화와 일치와 연합과 협력과 서로를 배우기를 좋아하고 추구했다"고 소개했다. 때문에 웨슬리의 교리는 수백 년 간 갈라진 채로 때로는 갈등을 겪으면서 살아오는 교회들 간에 친밀한 교제와 대화, 다 나아가 협력과 일치를 돕는 진정한 '브릿지 교회'(Bridge Church)의 역할을 하기에 가장 좋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III. 20세기 틸리케의 개혁과 성령
헬무트 틸리케는 현대 독일 신학자 가운데서 가장 복음주의적이며 교회정위적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로서 나치가 게르만 신화로 역사를 신격화 할 때 그것에 저항하여 박해를 받았으며,
역사적 상황의 도전에 하나님 말씀으로 응전하는 적응의 윤리학을 전개했으며, 그의 교의학을 성령론적 신학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교회적 신학자였다. 1986년 3월 5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설교하던 '성 미카엘 교회'를 바라보며 폐질환으로 78세로 그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서전 제목처럼 "이 아름다운 별 위의 손님"으로 머무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틸리케는 대학 시절, 호흡장애를 일으키는 '갑상선종'(Pulmonary Embolism)'이라는 질병을 앓았다. 이 질병은, 신진대사에 필요한 호르몬인 티록신을 분비하는 갑상선에 생긴 혹으로 인해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이에 따라 마아부르크(Marburg), 엘랑겐(Erlangen)과 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병의 후유증으로 심한 마비현상이 나타나면, 걸을 수도 없고 몸을 구부릴 수도 없어 휠체어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 옷을 입을 수도 없었고, 시험 답안을 겨우 써낼 정도였다. 간질병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였다면, 갑상선종은 틸레케의 육체적 가시였다.
이때 틸리케는 '피조물로서의 불안'과 죽음을 체험하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어느 날, 신경위축을 억제시키는 데 사용하는 약이 자신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결단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날 밤, 틸리케는 병상 침대에 마주 서 있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만지는 손과 구원받았다는 느낌 그리고 충만한 능력이 온 몸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건을 통해서 1933년 '성 금요일'에 병상에서 일어났다. 이 치유사건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논문에 열정을 쏟았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931년, 엘랑겐 대학의 헤리겔(Eugen Herrigel) 교수에게서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틸리케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기적적인 치유의 체험을 통해, 신학을 강의실이 아닌 인간 실존의 고통과 영성에 관련된 성령론적 신학으로 전개하게 된다. 학문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존적인 신앙을 체험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이론적인 강단신학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의 신학은 칼바르트, 불트만 그리고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의 신학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분히 종교개혁적이며 신앙 우위적이었다. 그의 신앙과 신학은 이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1937년, 목사 딸 마리루이스(Hermann, Marie-Luise)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본(Bonn) 대학에서 칼바르트의 교의학 강의를 들으면서 틸리케는 변증법적 신학의 틀을 배웠다. 그때 명석하게도 바르트 신학에 윤리적 차원이 배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틸리케는 바르트 신학이 도외시한 '일상적 삶'의 지평과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신학윤리에서 정치윤리와 경제윤리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동기가 된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신학적 윤리』(Theologische Ethik)라는 4권의 거대한 시리즈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가 히틀러에 대항하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의 대표자가 되었을 때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40년 이후에는, 비텐베르크(Wittenberg) 라벤스부르그(Ravensburg)에서 대리 목사로 일했다. 하지만 독재정부로부터 강연, 저술, 여행 금지를 당하고 만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틸리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심판과 은총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읽었다. 그는 고난에 대한 질문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에 참여하는 해방을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심연의 절망 속에 계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두려운 침묵이다. 그러나 겟세마네와 골고다 배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자리 잡고 있다.
1945년 종전 후, 그는 신학교수로 복직되었다. 1951년에는 서독대학 총장연합회 회장이 된다. 1954년 독일 북부 자유도시 함부르크(Hamburg) 대학에 신설되는 신학부 학장과 조직신학 정교수로 옮겨 봉직하다가, 1960-1961년에는 함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1974년 정년퇴직 후에도 함부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동시에 함부르크의 성 미카엘(St. Michael) 교회에서 여러 인종과 계층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는 등 목회활동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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