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자원 개발 비리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발견되면서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해당 메모지에는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친박 핵심 인사 8명의 이름과 금액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후 검찰 수사로 이어진다면 박근혜 정부의 폐부를 깊숙이 찌를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MB) 정부를 향했던 사정(司正)의 칼날이 박근혜 정부에게 오히려 독(毒)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울러 양날의 검(劍)인 '사정의 칼'을 빼어들 때는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도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성완종 리스트 파괴력 얼마나 되나
성 전 회장이 메모한 것이 맞다면 '리스트'의 파괴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10일 검찰에 따르면 성 전 회장이 사망 당시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지에는 김기춘·허태열 전 비서실장 등 정치인들의 이름과 함께 금액 등이 적혀 있다.
메모지 내용 일부는 성 전 회장의 인터뷰 내용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앞서 성 전 회장은 사망 당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김기춘·허태열 전 비서실장 등에게 각각 미화 10만 달러, 현금 7억원을 건넸다고 폭로한 바 있다.
검찰은 우선 메모지에 대한 필적 감정을 통해 성 전 회장이 작성한 게 맞는지 확인해보고 정식으로 수사에 착수할 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단체까지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있는 만큼 사실상 친박 핵심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핵심 인물인 뇌물공여자가 사망한 상황에서 메모지에 적힌 이름과 금전 액수만으로는 금품이 오고간 배경이나 구체적인 전달 과정, 뇌물의 대가성 여부 등을 밝혀내는데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성 전 회장 주변인물의 진술을 받아내더라도 뇌물을 받은 당사자가 완강히 부인할 경우 혐의를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물적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의식한 검찰 수뇌부도 현재로서는 수사 여부를 섣불리 단언하기 보다는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지 않을 경우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진정서나 고발장을 제출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검찰로서는 사건 배당 절차를 거쳐 겉으로는 수사에 착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지만,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더라도 장기화 국면으로 끌고 가거나 수사 의지가 부족해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 정국을 휩쓴 '정윤회 문건' 파동처럼 사안 자체가 정치쟁점화되면서 야권을 중심으로 특검론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검찰로서도 정권에 부담을 주는 직접 수사보다는 특검에 '공'을 넘기는 출구전략을 검토할만 하다.
결국 '성완종 리스트'가 특검으로 이어질 경우 특검 수사의 방향과 대상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메모에 등장하는 인물을 비롯해 사실상 친박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을 대한 수사가 본격화 될 수도 있다.
성 전 회장이 10년 넘게 정치권에 발을 들이면서 '마당발' 인맥으로 전현직 정부 주요 인사 등과 상당한 친분을 맺어왔던 만큼 '성완종 리스트'의 파급력은 상당할 것 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박근혜 정부 도덕성·정당성 타격 불가피
김기춘·허태열 전 비서실장 등에 대한 성 전 회장의 폭로는 사실 여부를 떠나 이미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메모지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들이 대부분 친박(親朴) 핵심으로 꼽히는데다, 전직 비서실장이 두 명이나 연루되면서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 전 회장이 김기춘·허태열 전 실장 등에게 돈을 건넸다고 주장한 시점이 2006~2007년이라는 점도 박 대통령에게는 상당한 부담이다. 이 시기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을 전후인 만큼 검찰 수사가 경선자금 수사로 확대될 수 있다.
더욱이 지난해 말 이미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청와대로서는 이 사건이 경선자금 수사로 확대될 경우 조기 레임덕 우려가 현실화될 전망이다. 오는 29일 실시되는 재·보궐 선거는 물론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에도 파장이 미칠 수 있다.
◇검찰 수사 '주목'…처벌 가능성 배제 못 해
검찰은 메모지에 이름이 오른 인사들을 공식 거론하는 것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폭로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금품 제공 당사자인 성 전 회장이 사망한데다, 공소시효 등 법리적인 문제도 있으며 무엇보다 현실 권력을 타깃으로 해야 하는데 따른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핵심 관련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사안의 진상을 확인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며 "사안에 따라서 공소시효 등 법리적인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공소시효를 따진다고 해도 처벌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는 7년이어서 2006~2007년에 이뤄진 일에 대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는 없지만 뇌물죄 적용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뇌물죄의 공소시효 역시 7년이지만 수뢰액이 3000만원 이상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돼 공소시효는 더 늘어난다. 현행법에 따르면 수뢰액이 1억원이 넘을 경우 공소시효는 15년이지만, 2007년 12월21일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개정 이전 수뢰 행위에 대해선 10년의 공소시효가 적용된다.
성 전 회장의 폭로대로 김기춘· 허태열 전 실장에게 거액의 금품을 제공한 게 사실이라면 검찰이 대가성 여부를 입증,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를 적용해 사법처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