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金敎臣, 1901~1945)에 대한 한국교회사적 의의를 찾자면 무엇보다 일본 우치무라 간조(1861~1930)의 '무교회주의'를 조선에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교회가 일제의 폭력에 변절되어가던 때 기독교의 예언자적 정신과 민족의 양심을 보여줬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김교신은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 장개석을 눈여겨 봤다. 김교신은 반사회주의적 입장에서 성서입국이란 확고한 기독교적 노선에 서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이 세례를 받은 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당시 조선교회도 기독교인 지도자 장개석을 눈여겨 보고 있었고, 장개석에 대한 지지에 있어 조선교회와 김교신은 같은 시각이었다.
전인수 교수(그리스도대학교 교회사)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34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김교신의 중국이해: 장개석을 중심으로" 소논문에서는 무교회주의로 말미암아 이단으로까지 매도 되었던 김교신의 삶과 그의 장개석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서술되어 있었다.
특별히 김교신이 장개석을 지지한 이유는 세가지인데, 첫번째는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다. 더불어 두 번째 이유는 김교신이 중국에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김교신이 일제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교신이 이렇게 장개석을 지지했지만, 그러나 역사는 그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중국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에 이해 통일됐고, 중국 기독교는 서양과의 관계를 끊고 사회주이 건설에 이바지했던 삼자교회로의 길을 가속화하게 됐다.
전인수 교수는 "일제 통제가 심해지는 조선교회를 하나의 위기로 진단했던 것처럼, 김교신이 신중국의 역사적 상황을 목도했다면 중국 정부이 통제 아래 있는 삼자교회를 또 다른 위기로 진단했을 것"이라 했다.
한편 전 교수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란 교회의 교권주의와 형식주의, 그리고 교회가 구원을 매개한다는 사상을 거부한 것으로 복음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서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오해받았던 사상이 교회를 살리는 사상으로 재평가 된 적은 적지 않다"고 변호했다.
전 교수의 발표에 대해서는 한규무 교수(광주대)가 논찬을 했다. 또 전 교수의 발표 외에도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가 "해방 직후 조만식과 남한의 정치"를 주제로 발표했으며, 장규식 교수(중앙대)가 논찬자로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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