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주시대(Cosmic Epoch)'의 도래
지난 2014년 3월 17일 미국 하버드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센터 연구진은 기자회견에서 "남극의 전파망원경 '바이셉(Beicep) 2'로 3년간 추적한 끝에, 지금부터 138억년 빅뱅(Big Bang) 직후 찰나에 '점' 하나가 광대한 우주로 급팽창 있음을 입증하는 '중력파(重力波)'의 흔적을 처음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것으로 우주 탄생이론, 곧 '빅뱅'이론이 관측을 통하여 확인되었다며, 그들은 기뻐하였다. 다시 말하면, 138억년전 백뱅(Big Bang)이 일어난 우주는, 탄생 직후 '10의 33제곱분의 1초'에 우주가 '10의 20제곱'배 (100억 곱하기 100억 배)이상 팽창되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다가 우주는, '빛을 이루는 광자'가 뜨거운 우주의 전자와 양성자에 가로막혀 더 이상 팽창되지 못하게 되었는데, 우주가 다시 식어지면서 Big Bang 때 생긴 '중력파'가 '전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비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온 우주로 퍼져나간 '빛'이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우주배경복사'라는 '전자기파'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 급팽창으로 인하여 나온 '중력파'를 역추적하면 'Big Bang'이 일어난 시점을 정확히 알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장 오래된 빛은 'Big Bang' 후 38만년 만에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과학자들은 우주 급팽창으로 나온 '중력파'를 역추적하면, '빅뱅'이 일어난 시점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우주를 하나로 볼 수 있는 '대통일 이론'의 토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우주의 기본 힘을 '강력(强力)', '약력(弱力)' 그리고 '전자기력(電磁氣力)'으로 나누어 보고 있는데, 만일 '빅뱅' 이후의 중력파가 있었다면, 이상 3개의 '힘'을 하나의 '통일된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통일 이론'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1)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학적 우주발생론, 곧 'Big Bang'이론과 '중력파 발견'은, '자연과학적 우주신화'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사(前史) 시대 '오르페우스' 교의(敎義)에 의하면, "태초에 혼돈Chaos과 밤(어두움)이 있었다. 이 '카오스Chaos'는, 글자 그대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공허(空虛)나 심연(深淵)인데, 바로 이 '카오스(혼돈)'에서 '알', 곧 '세계의 알'이 나오는데, 이 '알'에서 '날개'가 달린 '에로스Eros'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에로스'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명부(冥府)에서 날개가 달리고 어두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심연'과 짝하여 '빛'이 생겨났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세에 이 우주(宇宙)의 시원(始原)은 두 개(황소와 사자)의 머리를 가진 '용(龍)'이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이 '용'은 나이를 먹지 않는 '시간의 용(龍)'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따라서 'Big Bang'과 그 이후에 생긴 '중력파' 그리고 전자기장의 '우주 대통일 이론'은 이미 고대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우주 신화'에 상응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Big Bang'이후 생긴 한 '점'은 '세계의 알'에 상응하고, 그 이후에 생긴 '중력파'는 '날개가 달린 에로스Eros'에 상응하고, '빛'은 '에로스'가 심연과 짝하여 생긴 '빛'에 상응하고, '강력, 약력 그리고 전자기장'의 '우주 대통일' 이론은 우주 시원의 두 머리 '황소와 사자'의 머리인 '시간의 용'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비교 내지 상응은 증명되거나 확인될 수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구조적인 면'에 있어서는 '빛'의 '생성과 팽창 그리고 통일'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학적 '우주발생론'에 상응하게 화이트헤드(A. Whitehead)는 자신의 책,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전자적 현실적 존재", "양성자적 현실적 존재" 그리고 에너지의 양자(量子)에서 희미하게 식별될 수 있는 훨씬 더 "궁극적인 현실적 존재"가 "전자기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를 '우주시대(宇宙時代)'로 규정하였다.(과실, 195)3) 그러나 '자연의 질서'에서는, 임의적인 요인들이 '전자기적인 법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4차원의 '시-공 연속체', '기하학의 공리', 그리고 심지어는 '연속체의 단순한 차원적 성격'까지 있다는 것이다.(과실, 195) 그래서 그는 "'우주시대Cosmic Epoch'는 기본적으로 '전자적・양성자적 계기를 포함하는 전자기적(電磁氣的) 계기들의 사회"라고 단정하고 있다.(과실 196) 그리고 그는 이 모든 특성을 '연장성'이라는 기본 사상으로 종합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데카르트, 뉴턴, 록크, 흄 그리고 칸트의 우주론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구축된 것들"이라고 평가한다.(과실 196)
그러나 이상의 '자연과학적 우주관' 혹은 화이트헤드의 '연장성' 개념에 상이하게, 신약성경도 '우주'를 '7일간'이라는 연장성 속에서 생성된 '우주통합론'을 제시하고 있다.4)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천체물리학 앞으로 발견하고자 하는, '우주대통일' 이론을 이미 계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 산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를 나누시는 광경을, 이 세상에 살고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목격하는 사건을 통하여 이미 '우주 대통합'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마 17:1-8) 한 마디로 말하면, '변화 산'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시(時)-공간(空間)의 지평융합'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상응하게 Whitehead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시대'에 있어서 '변형의 장소'는 "두 개의 '평탄한' 3차원의 면에 의해서 한계 지워진다. 이 자리의 일부의 성원이 이 변형의 느낌strain feeling에 있어서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이러한 점들의 쌍(雙)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는 투사자들(projectors)은 그 변형의 장소 내의 종속적 영역을 한정할 수도 있다. 이 종속적 영역은 '초점적 영역'이라고 불린다."(과실, 559) 이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이 서로 한정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어떤 것 - 역으로 말하면, 투사자projectors, 신학적으로 말하면, '계시자(啓示者)'에 의해서 -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는 최근의 우주발생이론인 'Big Bang'이론과 '중력파' 발견을 계기로 '우주 대통일'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성경은 어떠한 우주대통합, 곧, '우주의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제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연구의 단초를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의 지평확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스티브 호킹의 'Big Bang'이론 이후의 '우주팽창' 이론과 화이트헤드의 '우주시대의 변형 장소'이론과 경이 증언하는 '우주의 시-공간의 지평융합'(김재진의 terminus)사이의 차이점 혹은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Big Bang'이론과 화이트헤드의 '자연과학적 우주관'을 성경의 우주론과 비교 분석해 봄으로써, 한편으로는 '과학(科學)과 신학(神學)'의 대화를 모색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 '우주시대' 속에서 '생명(生命)과 죽음(사망)' 자연과학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가상적 지속'과 '자연 생명의 사멸'에 관하여 논구할 학문적 단초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우주시대의 '별들의 나라'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 '천체 물리학적 우주관'을 논구할 학문적 전제(前提) 내지는 탐구의 이유(理由)가 어디 있는가? 왜 신학이 '우주관'에 관하여 논의해야 하는가?
II. 종교(신학)의 토대로서의 우주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는 참으로 실재(實在)하는가? 실재한다면, 그 나라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종말론'적 전망에서만 답변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래서 여러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단지 종말론적 관점에서 소위 '철저적 종말론', '묵시문학적 우주론적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 '선취된 종말론' 등, 서로 다른 신학적 종말론을 주장하여 왔다.5)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은 사실상 '우주론(宇宙論)'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론'은 '창조'와 '종말'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창조'는 현실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우주창조'이고, 종말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1:8; 21:6)6)고 단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신학은, '우주(宇宙)'에 대하여 언급함에 있어서, 우주를 단지 하나님의 의한 '창조물'이라는 단설(單設)적 파악에 만족하여 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창조에 관한 성경의 제사[P] 문서의 진술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단순한 증언만 주목(注目)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론과 관련된 '우주론적 진술'은 기껏해야 '계속적 창조'냐 아니면, '창조의 보전과 완성'이냐, 아니면 '새 창조인가?' 라는 논의에 한정되어 왔다.7) 이렇듯 성경의 '우주론'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까지의 신학은, '자연과학적 천체물리학'의 '우주관'에 밀려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으로 관념화시켰다.8) 그래서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 이후로, 성경의 모든 우주론적 진술들은 - 예컨대 예수님의 승천과 천사의 현현 등은 - 모두 비역사적 진술인 '신화(神話)'로 치부되어, 복음의 '비(非) 신화화(神話化)'가 주장되고 있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우주관'에 사로잡혀 있는 최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보이지 않는 '영적(靈的) 세계'를 무시하고, 불트만이 주장한 '윤리적 케리그마'로 성경의 증언을 일관(一貫)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우주(宇宙)와 연관된 '예수님의 부활현현', '승천', '천사들의 현현', '에덴과 낙원', '하나님의 나라', '수많은 묵시',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 산에서의 변모'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증언들은, 분명 '우주론(宇宙論)'와 - 더 자세히 말하면, '보이는 세계'과 '보이지 않은 영적 세계'와 -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우주론'은 '창조론'에서뿐만 아니라, 신학 전반에 걸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그리고 결코 쉽게 다룰 수 없는 학문적 주제이다. '우주론(宇宙論)'은 모든 종교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창조론', '종말론', '교회론', '구원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윤리'와도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셨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과 신학적 언설들은 모두 '우주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A.N.Whitehead)조차도 '우주론'은 '종교의 토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는 우주론의 주제는 영속적 통일성 속으로 이해하는 세계의 역동적인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며, 세계의 다양한 노력을 흡수함으로써, 완결의 목적을 달성하는 신(神)의 비전의 정태적인 위엄에 관한 이야기이다."(과실, 599하.)9)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이야기는 정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사에 의하면, '철학philosophie' 이전에 '신화mythos'가 있었는데, 그 신화(神話)는 다름 아닌 바로 '우주발생론'이었기 때문이다. 즉 'Logos(합리적 논리적 진술)'를 중시(重視)한 '철학'은 바로 '신화Mythos',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주발생론'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10) 예컨대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들을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는"처음으로 신화를 이야기한 사람들(οἱ πρῶτοι θεολογήσαντες)"이라고 칭하였다.11)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최초에 철학하기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영영에 있어서, 최초의 근원(원리ἀρχαί, principia)을 찾아 헤맸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 근원들은 사물의 참된 실체(본질, οὐσία)이며, 이 참된 근원들에서 사물들이 생겨나서, 다시 그것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였다.12) 그래서 스토아Stoa 철학의 '자연학(自然學)'으로부터 시작하여, 신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중세의 토마스 아퀴누스에 이르기까지, '신(神)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할 때, 신학자들은 항상 '우주론적(宇宙論的) 증명(Cosmological Argument)'을 시도해 왔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 스콜라Scholar 신학에 기반을 둔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창조론과 관련된 주제를 확장하여, 자연과학적 우주발생론, 곧 '빅뱅Big Bang'이론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 영역에서도, 천체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우주 대폭발Big Bang'이론과 '우주팽창'에 대하여, 미하엘 벨커(M. Welker)가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화 차원에서 몇 편의 결과물을 내어 놓았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적 우주관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시-공간적 우주통합'을 아직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각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 제III장에서는 자연과학적 우주관을 화이트헤드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 성경의 우주론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14)
III. 근대 자연과학적 우주관의 특성
화이트헤드는 흄Hume과 칸트Kant이후 지금까지 '우주론'을 지배해 온 3가지 오해에 대하여 기술한다.: "이 시기의 우주론은 다음의 세 가지 그릇된 생각 중의 어느 하나에 역점을 둔 나머지 그 발전이 저해되어 왔다.: !) 현실태에 관한 실체 속성의 이론, !!) 지각에 관한 감각주의적 이론, !!!) 개관적 세계를 주관적 경험의 구성물로 보는 칸트의 이론. 이러한 오류들이 일체가 되어 ... 철학은 오늘날의 사고 형태를 형성함에 있어, 그 영향력을 무시당하는 신세로 전락되었다"(과실 299하)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철학적 우주론'을 단적으로 거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는, 칸트가 '주관주의적 우주관'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순수이성비판』에서 채택한 형식의 주관주의적 학설에 따르면, '시간적 세계' 내의 그 어떠한 요소도 그 자체로서 경험자experient일 수는 없을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 칸트의 시간적 세계는 그 본질에 있어 죽어 있는 것, 환상적(幻想的)인 것, 현상적인 것이었다."(과실, 355)고 화이트헤드는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자연과학에 기초한 '유기체 철학'을 정립하고자 한다.
우선 화이트헤드는 '우주질서'는 곧 '자연 질서'라고 단정한다.: "우리는 '자연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 이때에 '질서'란 우리의 관찰안으로 들어오는 한정된 우주의 부분이나 지구 표면의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질서를 지키면서orderly 사는 사람'이라거나, '무질서하게disdorderly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된다."(과실 192) 이 말에 의하면, 그가 이해한 '우주'는, 생성된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는 곧 '우주질서'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우주의 본질은 '생성하는 것the becoming'이고, '존재하는 것the being'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는 '생성하여 존재하며', 서로 관계성the relattion을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실적 존재'는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진정한 사물res vera'이고 그 사물들 사이에는 '사물의 연장성res extentia'을 갖는다고 그는 이해한다.(과실, 43)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how an actual entity become라는 것이 그 현실적 존재가 어떠한 것인가what that actual entity is를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 현실적 존재의 '있음'은 그 '생성(生成)'의 의해 구성된다. 이것이 '과정의 원리'이다."라고 확언한다.(과실, 81) 이렇게 그가 모든 현실적 존재를 '생성된 것, 혹은 생성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정체적인 존재, 확정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끊임없는 생성, 변화, 합생, 그리고 또 다시 생성의 과정 속에 있는 단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일 뿐이다.
그러나 그 '생성becoming'을 단순히 '유일한 순차성unique seriality'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생성'은 오히려 '창조적 전진creative advance'이라는 의미를 가진다.(참조 과실 103) 즉 '창조적 전진'은 단순히 '유일한 순차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이 생성된다는 것은, 연속성 속에서 생성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속성의 생성은 있지만, 생성의 연속성은 없다"(과실, 103)고 말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적 계기는 생성하는 피조물이며, 연속적인 연장적 세계(우주)를 구성한다. 다시 말하면, 연장성은 생성되지만, '생성' 그 자체는 비연장적이다."라고, 그는 말한다(과실, 103).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창조적 전진creative advance'란, 용어를 유일한 순차적 전진의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102)고 강조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우주의 연장적 연속성extensive continuity"은 있지만, "생성의 연속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존재being'은 '생성되고 있는 것be(com)ing'이다.: "그것(= 현실적 존재)는 '있음being'으로 되어 온 것인데, 모든 '있음'이 모든 '생성be(com)ing'을 위한 가능태라는 것은, 모든 '있음'의 본성에 속한다."(과실, 120)15) 그래서 그는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는 네 단계를 '여건datum', '과정process', '만족satisfaction', '결단decision'으로 본다.(과실, 28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말하기를, "여기서 처음과 끝의 두 단계는, 정착된 현실 세례로부터 그 정착이 상대적으로 한정되게 되는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 이행해 간다는 의미에서 '생성becoming'과 관계 된다."(과실 289)과 결론짓는다. 이런 점, 그가 말하는 '과정'이란, 다름 아닌 바로 '창조적 관념'이 결정적인 개체성을 한정하고, 달성하기 위해 작용하고 있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참조. 과실, 290)
이상 간략히 살펴본 기본적인 '사유체계' 속에서, 화이트헤드는 '우주'도 '유기체적인 현실적 존재'로서 역시 '생성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꾸어 말하면, '미시적microscopie' 관점과 '거시적macroscopic' 관점, 즉 '소우주적microcosmic' 관점과 '대우주적macrocosmic' 관점을 종합하여, 우주를 '신'과 '자연'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사변적 '유기체적 현실'로 파악한다.:
"유기체 철학은 ... 다음의 두 학설을 제공한다.: 즉 !) 욕구의 기본적인 완결성을 구현하고 있는 신(神)에 관한 학설과 !!) 신을 포함한, 우주의 합생을 가져오는 각 계기에 관한 학설이 그것이다. 그래서 개념적 재생의 범주Category of Conceptual Reproduction에 의해, 신(神)의 욕구God's appetition와 다른 계기들에 대한 벡터적 파악은 개념적 파악은 개념적 파악의 정신적 극mental pole에 귀착되고, 이 정신적 극과 순수한 물리적 파악과의 통합에 의해, 정서적 및 목적적인 주체적 형식을 수반한 감각여건에 대한 근원적인 물리적 느낌이 생기게 된다."(과실, 549)
이러한 유기체 철학에서 정의에 의하면, 우주에 대한 묵시적(계시적) 요소를 단순히 거부하였던 일련의 순수 자연과학적 우주관을 거부하고, 우주 내에서 신의 실존을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모든 점에서 신(神)과 세계(우주)는 그들의 과정과 관련하여 서로 역(逆)으로 움직인다. 신은 원초적으로 일자(一者)이다. 즉 신은 다수의 기능적 형상들의 관련성에 대한 원초적 통일이다. 과정에서 신은 결과적 다양성을 획득하고, 원초적 성격을 이러한 다양성을 그 자신의 통일성 속에 흡수한다. 반면에 세게(우주)는 원초적 다자(多者), 즉 물리적으로 유한성을 지닌 다수의 현실적 계시들이다."(과실, 599) 그러나 그에 의하면,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전통에서 묵시적인 가정이, 거부되고 있는 점을 혹평한다. 그는 오히려 경험의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 '사고', '감각지각sense-perception'이라는 세 가지 요인 가운데 하나도 무시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전부에 의해서 기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 마지막 술어인 '감각지각'은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의식적 지각'(conscious perception in the mode of presentational immediacy)의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감각지각'을 단지 '시(視) 지각(知覺)visaul perception'으로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신(神)'이든 '세계의 현실적 계기'이든 모두 양극적dipolar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神)의 성립은 정신적 극에서 시작되고, 현실적 계시의 성립은 물리적 극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물질적 연장적 연속성을 통한 생성의 과정을 통하여 극(極)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대 천체물리학과 창조를 포함한 기독교의 복음의 관계는, 화이트헤드의 「학문과 현대세계Wissenschaft und moderne Welt」의 "종교와 학문"이란 장(章)의 다음과 같은 증언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갈릴레오가 말하기를, 태양은 정지해 있지만, 지구는 움직이고 있다; 반면에 카톨릭 종교재판소(Inquisition)는, 지구는 정지해 있고, 태양은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반하여 우주공간에 대한 하나의 절대적 이론을 대표하는 뉴톤적(Newtonschen) 천문학자들은 태양 뿐만 아니라 지구도 역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들은 모두 동일하게 진리이며, 이러한 세 가지 주장들은, 사람들이 '부동(Ruhe)'과 '운동(Bewegung)'에 관한 의미를, 마치 그 의미가 세 가지 주장 속에서 사용될 수 있는 의미로 확정하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요즈음 갈릴레오와 종교재판소의 논쟁은, 갈릴레오의 진술이 의심할 여지없이 학문적인 연구를 위해 보다 효과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진술 그 자체는 종교재판소의 이론체계(Formulierung) 보다 더 참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당시는 아직 아무도 상대적 운동의 현대적 개념들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성에 대한 철저한 해명이 요청될 수 있다는, 바로 그 한계성(Einschränkung)에 대한 무지(Unkenntnis) 속에서 그러한 주장들이 제시되었다. 지구와 태양의 움직임에 관한 문제는 우주 속에 있는 하나의 실제적인 사실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이와 관련된 의미있는 진실들(Wahrheiten)이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이러한 진리들이 통일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16)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어떠한 우주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가? 이점에 관하여 우리는 아래에서 성경에 나타난 '우주'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IV. 성경의 7가지 '세계'(장(場: Feld)'과 세 번째 '하늘'
신약성경의 증언 가운데서, 가장 사실적(事實的)이고 신빙성(信憑性) 있는 것은 – 많은 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부활의 최초 목격자들의 증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마, '베드로의 증언'을 가장 신빙성 있는 역사적(歷史的)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베드로가 인생의 황혼이 잊어졌을 때, 유언(遺言)처럼 남긴 '베드로의 마지막 증언'이 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후서 1장 17-18절에 이르는 말씀이다. 여기서 그는 변화 산에서 체험을 증언하고 있다.: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 하나님, 필자 주)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7-18) 이러한 사건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였다고 사도 베드로는 16절 하반 절에서 증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사도, 베드로가 '거룩한 산'에서 경험한 사건은, 마태복음 17장 1-23(병행 막 9:2-13; 눅 9:28-36)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1-5)
이 사건을 신학자들은, 소위 '예수의 변형(變形)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산(山)을 가리켜 혹자는 '변화 산'이라고 부르고, 사도, 베드로는 '거룩한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산에서 '신령한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떠한 세상인지, 곧 성경이 증언하는 '宇宙觀'을 계시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언하는 '우주(宇宙)'는 어떠한 세계일까? 우선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동시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 '변모 사건'에 대한 증언에 의하면, 성경 속에는 적어도 '7차원(次元)' 혹은 '7가지 세계(世界: 場: Feld: 時-空間)'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첫 번째 세계는 4절 말씀에 나타나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 세계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세계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실 세계'이다.
2. 두 번째 세계는 3절에 나타나 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예수님께서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세계는, 이 세상을 이미 떠나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있는 자들의 세계', 곧 '죽은 자들이 부활한 세계'이다.(참조. 마 27:53; 계 20:4-6)17)
3. 세 번째 세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없는 모세와 엘리야와 세계와 동시에 베드로와 야고보과 그의 형제 요한과 함께 있는 세계, 곧 '지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즉 한편으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보이지 않는 '첫째 부활의 세계'(참조 계시 20:5; 마 27:53)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겹쳐진 '세계'이다.18)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세계'는, 실제로 현존하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영적(靈的) 세계'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4 시-공간의 '현실세계'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모습을 이 세상에 있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그의 형제 요한이 목격한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보이는 이 세상'에 동시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의 세계'이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시던 세계', 곧 "신령한 영의 몸"(고전 15:44)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다시 살아지고,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 바로 그 '세계'이다.
이상 모두 모두 3가지 세계가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세계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5절에 나타나 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절) 여기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居)하시는 세계', 곧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죽은 자들이 부활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꿰뚫고 직접 우리가 있는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는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이가 순교할 때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고 하였기 때문이다.
4. 네 번째 세계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세계는,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없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통과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이 지상의 역사 속으로 '홀연히' 뚫고 들어오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직접 만나는 세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모세'가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세계, 오순절 '홀연히' '성령이 각 사람들에게 임하는 세계',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세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세계'가 예수님의 '변모' 산에서 계시된 네 번째 보이지 않은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데 이상 4가지 세계 이외에 - '변모 산'의 사건에서 계시되지 않은 - 3가지 세계가 더 있다.
5. 그 다섯 번째 세계는 천사 혹은 악마의 영적 세계이다. 이 세계는, '천사' 혹은 '하나님의 사자'와 인간이 만나는 세계이다. 이것을 우리는 사도행전 12장 7-11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행 12:7-11)
여기서 '주의 사자', 곧 '천사'는 분명히 베드로와 동행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와 베드로'가 있는 세계는 '우리들의 이 실존세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와 베드로가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갈 때, 그들이 천사와 베드로를 보지 못하였고, (굳게 닫힌) 쇠문도 저절로 열렸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있는 '다섯 번째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여호수아 5장 13-15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3-15)
이 말씀에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말씀은, 호렙 산에서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임이 분명한다.
6. 여섯 번째 세계는, '사탄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세계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마 4:1-11, 병행 막 1:12-13; 눅 4:1-13) 이 세계는, '욥의 시험'에 관한 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태초에 최초 인간, 아담(Adam)과 이브가 '뱀(사탄)'에게 유혹받는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탄, 마귀'의 세계는 '죄와 악'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는 '육(肉)의 몸'인 우리 자신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탄'은 '시험하는 자'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의 생각, 마음에 들어와서 유혹하고, 시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병행 막 8:33)라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베드로(Peter)도 자신도, 아나니야에게,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고 책망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여섯 번째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진멸되어야 할 세계'이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의 세계는 '허무(虛無)의 세계'이며, '무(無)의 세계(Der Welt des Nichtiges)'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이 '사탄, 마귀'의 세계를 진멸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똑 같은 '육(肉)'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2장 14-16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血)과 육(肉)에 속하였으매, 그(= 예수님)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血)과 육(肉)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그래서 요일 3장 8절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고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병행 눅 4:34)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이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 그 세계는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惡)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24)
이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도 '육'에 속에 있는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사탄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19-21a)이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갈 5:21b)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같은 것을 금지할 (수 없이)"(갈 5:22-23) 뿜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사랑'과 '평안'과 '온유함'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뿜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섯 번째, '사탄, 마귀의 세계'를 우리에게서 배척(排斥)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고 단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신앙은 다름 아닌 '영적 싸움', 곧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교우들에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도,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게하기 위한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사탄, 마귀의 권세'를 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부름을 받은 목적'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내(= 예수님)가 너(= 사도 바울)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행 26:17-18)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7.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영적 세계는, 심판이후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사탄, 마귀'가 완전히 진멸되고,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세계)이다. 이 세계는 첫째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천년왕국'의 통치가 끝난 후에,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가 나라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낙원(樂園)'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세계는 우리 주님께서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한 강도에게' 허락해 주신 '세계'이다.(참조 눅 23:43)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자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런데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낙원'은 -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 마지막 유언기도에서 기도하셨듯이 – 바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계' 바로 그 '에덴' 동산과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 마지막 기도에서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사탄 마귀'로 인하여 야기된 '죽음(사망)'이 완전히 극복된 나라이다.(참조 계 21:4,7)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부활의 순서(과정)'을 고린도 전서 15장 21절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1-26)
그러므로 일곱 번째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 계시록 21장 3-4절에서 증언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 곧 낙원'을 - 곧 고린도 전서 15장 26절의 말씀처럼,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곧 사망"(고전 15:26)마저 극복된 나라를 –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바로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낙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다. 이렇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복된 나라를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 마귀'를 멸하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본 환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4)
V. 3개의 하늘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임마누엘 세계
이상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는 7가지 '세계'(世界: 場: Feld: 時-空間)'로 구분되어 있지만, '하늘'이라는 개념으로 종합하면, 모두 '3 가지 하늘'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으로 대별하면, '보이는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활동하는 세계를 '모세와 엘리야가 있던 세계', 혹은 '첫 번째 부활한 자들의 세계'를 동일한 '하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병행 눅 20:36)19)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세계, 곧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던 공간,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세계'는 종말에 있을 심판이 끝나고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과 동일한 시-공간이라고 보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늘은 첫째로, '사탄, 마귀'에게 시험당하면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창조의 하늘', 둘째로, '부활한 자들이 있는, 엘리아, 모세, 천사들의 하늘' 그리고 셋째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모두 3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상 앞에서 찾아본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적 실존세계'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공존'한다는 것이다.(참조 마 16:19; 마 18:18)20) 예컨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언제든지 경험될 수 있는 '세계'로 우리 가운데 함께 공존해 있다는 것이다.21) 예컨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死亡)"(고전 15:26)이 극복된 사람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약속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 단지 헬라 철학적 역사관(시간관)에 따라서 -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을 시간적으로만 이해하지만, 히브리 성경의 '인지구조'에 의하면, '가까이 있느니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도래할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자기에게)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VIII.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물질의 세계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결코 '물질세계'에 '내재immanenz' 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 세상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세상과 무관한 세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존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따라서 성경의 '우주론'은 천체물리학적 우주관 철저히 구별된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세계는 언제든지 이 '보이는 세상과 융합될 수 있다.' 그러기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창조가 새롭게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해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이 세상과 융합될 수 있는 세계'이다. 따라서 오늘날 최첨단 과학적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해도,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아인슈타인Einstein이 그의 말년에 고백한대로, 아직은 "불완전한 지식(imperfect knowledge"일 뿐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천체 과학적 물리학이 138억년에 있었던 우주 창조의 '빛'을 우리는 지금 오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이 한계점과 경계선을 분명히 하니 않으면, 초월적 하나님을 '미세한 생명체'과 동일시 할 수도 있는 누(累)를 범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