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한국구세군] 구세군 한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올해로 107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라를 일제에 강탈당하는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구세군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은 더욱 폭발적으로 대중의 영혼 속을 파고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계속되는 선교사관의 입국과 한국인 사관의 양성으로 구세군의 전도는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면서 경성(현 서울)을 중심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평양 및 신의주까지 전도여행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 갔습니다.
한편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Man)"라는 구세군의 선교정신은 1916년부터 전도사업과 더불어 사회사업을 시작하여 29명의 걸인아동을 돌보는 일을 목적으로 '남자실업관'곧 오늘의'서울후생원'을 개원하였고, 빈민 숙박사업, 여자 육아원(혜천원), 여자부양소(미혼모시설) 등이 신설되어 이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밝히는 등대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특히 1928년에는 최초의 자선냄비가 서울 거리에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초에는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 문제로 여러 사관들이 경찰에 구금되고, 외국인 선교사관들이 국외로 추방되며, 구세군은 구세(求世團)단으로 개편되는 등 수난과 암흑의 시기를 거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해방과 더불어 교회 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한국 구세군도 국제 구세군으로 복귀되어 복음 전도운동에 전념한 결과 교세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6.25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역경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기간 동안 노영수 사관을 위시한 몇몇의 사관들이 순교 또는 피살, 강제 납북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전쟁 시에 한국구세군 본부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기고 부산으로 몰려있던 피난민들을 위한 급식사업, 구호사업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전쟁 후 서울로 복귀하면서 외국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전쟁난민 구제 사업으로 고통과 슬픔, 가난에 지쳐있던 한국사회에 따뜻한 불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1970년까지는 도전과 수난 그리고 성장을 위한 준비의 시기였다면 1970년대는 한국 구세군사의 새로운 성장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1970년대에 처음으로 한국인 사령관이 취임한 이후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을 시도하고 한국인 스스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개척운동과 자급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더욱 구체화되면서 성장의 비전과 장단기 목표를 세우고 이를 각 지방으로 파급시켜 오늘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21세기를 전후하여 선교사업의 발전은 교회 사업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자선냄비운동이 매스미디어의 초점으로 떠오르고, 심장병 시술지원사업으로 700명이 넘는 심장병 환우들에게 새생명을 얻게 하였으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에이즈 예방과 대책을 위해 출발된 에이즈 대책팀, IMF이후 늘어나는 실직자를 위해 마련한 다일사(다시 일어나는 사람) 등으로 구세군의 사회봉사 활동은 대중에게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고 이 사회의 대다수의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교회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선교 100주년이 되는 2008년에는 "세상에 희망이 되는 구세군"이라는 비전을 품고 2028년까지 한국구세군의 장기발전을 위한 "희망프로젝트 비전 2028"를 가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출처] [구세군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작성자 한국구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