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한국구세군] 19세기는 기독교 선교사에 있어서 위대한 선교의 시기였습니다. 이전에 서구에 집중되었던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산되며, 특히 아시아를 새로운 선교 대상으로 삼고 활발한 개척 선교가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선교지 확장정책은 오랫동안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던 조선의 문을 열고 한국 땅에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입경(入京)을 하였고, 1907년에는 성결교가, 그리고 1908년에는 19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신앙의 영향 아래서 태동되었던 구세군이 일본으로부터 부산을 거쳐 서울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사실상의 한일합방이었던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1905년)되어 민족적으로 일제에 대한 감정이 고조되고, 급기야는 1907년에 일제의 침략정책에 맞서 유학자, 지식인, 농민, 옛군인 들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 난 때였습니다. 교회적으로는 제 2의 오순절 운동이라고 불리울만큼 뜨겁게 일어났던 민족 대부흥운동이 원산과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강타하며 절정에 달할 때였습니다.
구세군의 한국선교는 민족적으로는 목자 없는 양같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교회적으로는 복음의 씨를 위해 영적인 기경(起耕)이 활발하게 준비되고 있었던 때에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구세군의 대장이었던 윌리암 부스는 8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드넓은 중국대륙에 대한 선교비전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부스의 핵심 참모였던 조지 스콧트 레일톤(George Scotts Ralilton) 사관(부장)은 1904년에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 와 서울, 평양, 대구 등지를 돌아보고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 영국으로 귀국하여 부스 대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 후 1907년, 당시 79세의 노인 부스대장은 4월 16일에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여 5월 24일까지 일본을 둘러보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스가 일본에 체재할 때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유학간 200여명의 학생들 가운데 부스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은 학생들이 한국 방문을 요청하여 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갖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윌리엄 부스 대장은 레일톤 사관을 조선의 개척을 위해 다시 보냈고, 레일톤 사관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대장은 보고서를 심의한 후에 조선의 개척선교를 결정하였습니다. 그 해 7월 부스대장은 런던의 크리스탈 팔라스(Crystal Palace:수정궁)에서 구세군 창립 43주년 대회가 진행되던 그 시간에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한국이름 홍가두·영국인·1908~1916) 사관 부부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는 임명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허가두 사관 부부에게 태극기를 단 구세군기와 북을 수여한 후에 그들을 조선으로 보냈습니다. 8월에는 뻔윅 사관(참령)부부가 한국으로 임명받고 합류하여 전체 6명의 선교사 일행들이 일본을 거쳐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허가두 사관 일행은 곧장 경부선 열차를 타고 그 해 10월 1일 서울에 입경하여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에 위치한 서대문구 평동 76번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로서 구세군이 한국 땅에 복음의 깃발을 꽂고 나팔을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처] [구세군 이야기] 아홉 번째 이야기|작성자 한국구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