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성경신학회 제35차 정기논문발표회가 '요한 낙스와 한국교회'를 주제로 26일 오후 2시부터 신반포중앙교회(담임목사 김성봉)에서 개최됐다.
이날 '요한 낙스와 정치와 교회의 관계'를 주제로 발제한 이은선 박사(안양대학교/역사신학)는 "2014년은 낙스(John Knox, 1514-1572)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낙스의 출생연도에 대해 과거에는 1505년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1514년으로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며 "낙스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는 동안 로마가톨릭을 강요하는 국가권력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지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국가권력에 대한 무력저항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그래서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할 때 1559년 5월에 귀국해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함께 섭정인 메리 기즈(Mary of Guise)와 무력항쟁을 했고, 영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종교개혁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성공한 후인 1561년에 프랑스의 프랑소와(Francis) 2세와 결혼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Mary of Scots)가 남편이 급서하여 귀국하자 왕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그래서 낙스는 왕국에서 미사를 드리려는 여왕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결국 그녀가 1567년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천주교회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귀족들과 계속해서 논쟁을 하였고, 장로교회 제도의 정착에 대해 많은 갈등을 겪었다"며 "그래서 그는 초기에 감독(superintendent)제도를 인정하여 그가 장로교회를 세웠는지 아니면 감독제를 세웠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고 했다.
이 박사는 "낙스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가담해 결실을 맺었던 1560년까지의 그의 정치와 교회와의 관계를 검토하고 1561년부터 메리 여왕과 충돌하던 시기에 낙스의 정치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며 또한 "낙스가 초기에 장로교회를 수립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감독제 교회를 인정하려고 했는지 세 가지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결론에서 그는 "낙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하는 동안에 종교개혁을 진행하려는 세력에게는 순종하면서, 로마가톨릭의 미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며 "그래서 영국의 에드워스 6세 국교회의 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협력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툰스털 주교의 미사를 드리라는 지시를 거부하였고 감독 직책도 수용하지 않았고, 성찬식에서 반대하여 제2치리서에 무릎 꿇는 것이 숭배가 아니라서는 주서를 삽입하였다"고 했다.
이어 "그렇지만 메리 여왕이 즉위하여 영국에서 심한 박해가 일어나자 대륙으로 망명하면서 여성통치의 합법성, 귀족들에 의한 저항 가능성과 백성들의 참여의 합법성을 제기하였으나 대륙의 불링거와 칼빈 등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했다"며 "그는 독자적인 탐구를 계속하여 1558년 초에 여성통치를 근본으로 반대하는 첫 번째 울림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영국의 신분의회와 귀족, 그리고 백성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을 처벌하도록 요구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 출판은 원칙적인 여성 통치의 반대 입장 때문에 낙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귀족과 백성들에게는 국왕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로마가톨릭의 성직자들의 우상숭배를 처벌하며 종교를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며 "이러한 양자에 대한 요구의 차이는 영국은 이미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국가인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로마가톨릭의 통치 하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보편적으로 이탈한 국가이므로 직접적인 저항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이후 낙스는 1559년 5월 스코틀랜드에 귀국한 후에 무력저항을 하면서 영국의 도움을 받아 종교개혁을 성취하였다"며 "그는 1561년 이후에 메리 여왕이 귀국한 후에 미사를 드리자 하나님과의 언약의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력 저항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고 했다.
그는 "이와 같이 낙스는 하나님과의 언약 사상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한 하위 관리들의 저항의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이들이 저항할 경우 백성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며 "낙스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은 양 기관이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상호 협력하여 올바른 신앙의 확립과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로교 제도의 수립을 통해서 교회는 국가로부터 구별되는 총회 소집권과 치리권이 있음을 천명하여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의 자율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