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기장총회] 교회가 2000 년을 넘게 자기 정리를 위하여 해온 여러 가지 일들 중에 하나는 소위 이단과 사이비(소종파 운동과 이단들 사이비는 차이가 있다)로부터 순진한 양들과 성도들, 교회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 있다. 그것을 위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던 말씀들과, 파피루수와 양피지 등에 써 있던 하나님의 말씀들을 정경( Canon)화 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도합 66권을 기독교 교회 공동체의 표준 성경으로 공인하고 그것을 모든 이단과 사이비들의 공격과 그릇됨을 판별하는 공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와 우주만물의 구원을 위한 계시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근자에 들어서 외경들(특히, 카톨릭 등)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려는 학문적 여러 가지 연구와 논란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정경화된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이비와 이단들은 이러한 정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남용 해석의 차이에서도 올 수 있다는 것이 큰 흐름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 예수는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보면 무서운 이단이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든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든지 하는 것이 신성을 모독하는 참담한 일로 받아들여 졌고 제정일치의 시대에 이러한 기득권 종교에 반하는 것은 또하나의 정치적 위험 인물로 간주 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예수는 이리하여 정치범으로, 신성을 모독한 자로 당시의 가장 잔악한 십자가에서 무자비하게 처형 되었다.
이러한 예수의 죽음을 단지 구원사적 교리의 틀로만 해석 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진실과 사실을 외면하는 깊은 오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하늘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성서를 통하여 깊이있게 헤아려 보면 이 말이 무엇인가를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다.
예수는 거짓과 불의와 모순 된 이 세계, 기존의 인간들의 세계를 완전히 정죄하고 뒤집는 말씀과 행동과 실천으로 사시다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것이다. 그는 모세를 알고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 역사를 알고 계셨다. 예수는 인간의 삶과 하늘과 땅 우주만믈의 모든 진리와 생명, 정의와 사랑 , 자유와 평등, 삶의 도리, 그리고 모든 것의 근본을 아시며 그것들을 가르치시고 실천하며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다.
예수는 문선명이나 신천지, 박태선, 구원파 등 하나님을 앞세워 자기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 소유를 주장한 것이 없다. 그는 진정한 무소유 자 였고 , 모든 것을 가진 분 이었으며, 땅과 하늘 우주 만물을 넘나들며 사는 자유인 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과 함께 동행하시며 사신 분 이셨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동시에 예수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셨고 인간으로 오신 역사적 예수였다. 이 분은 바로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을 삶으로 보여주신 역사와 삶의 혁명가이시다.
인간들은 물질이 없으면 허전해 한다. 자기 자리와 권력을 붙잡으려 갖은 더러움과 추악한 거짓을 일삼는다. 썩을 것을 붙잡으려 하고 겉으로는 거룩으로 꾸미며 그것들을 과시하려 든다. 인간들은 무슨 업적을 남기려 한다.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남기려 한다. 혈육의 전통과 갖은 업적들을 남기려 안간힘을 쓴다.
냉정히 바라보면 우리가 사는 여기까지의 역사가 발전한 것이라고 믿어지는가? 인류가 추구한 문명의 결과가 어디의 종착점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믿는가? 동료 인간들을 속이고, 살인하며 자연과 사람을 폭력으로 정복한 인간들의 학문과 가치들의 결과의 마지막은 어디인가?
인간들의 유전 속에 "악의 씨앗, 죄의 씨앗, 거짓의 씨앗, 폭력의 씨앗" 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 비관적인가? 인간들의 역사는 발전하고 진보하고 그리고 끊임 없이 진화 할 것인가? 핵과 원전 처리 문제의 해결도 할 수 없고 자본의 극대화를 위하여 폭력과 거짓을 일삼는 인간의 역사의 최후는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시며 구원할 것인가? 그렇다고 믿어야 된다. 믿는다. 믿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데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타락한 자본주의든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 이단은 반 성서적이며 반사회적이며 반 역사적이며 반인간적이다. 예수의 탄생을 말하는 곳은 마태와 누가이다. 마가는 예수의 탄생설화를 생략한다. 더 늦은 요한은 복음의 시작을 예수가 아니라 말씀( 로고스로 시작하고) 으로, 바울은 부활 이후의 예수를 복음의 축으로 삼는다,(물론 십자가의 처형된 예수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이다)
예수의 탄생은 역사적인 일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오늘에 있어서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상업화의 한 대목인가? 역사의 불의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진짜 이단은 이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다. 아니 그 불의와 동조하고 타협하고 아부와 아첨을 하며 속은 회칠한 무덤이요 겉은 거짓된 거룩을 포장하는 음흉하고 더러운 미소를 짓는 것이다.
거짓된 거룩을 통하여 민중을 속이고 착취하며 자기 뱃속을 채워가는 위선자들이 모두 이단에 속한다.
예수의 탄생은 매우 기뻐할 일이다. 누가의 소식처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임하는 카이로스적 순간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영광을 보며 평화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없다. 악이 홍수를 이루고 폭력과 거짓이 땅과 하늘을 덮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고 우리의 평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기 예수가 순복음 중앙교회나 명성교회나 통합이나 기장 혹은 기감에 누우실까? 다른 교회공동체의 화려한 예배당에 누으시고 경배와 찬양과 몰약을 받으실까? 복지를 가장한 복지 착취 자나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의 권력자이나 거룩을 외치는 자들 위에 누우실까?
아기 예수는 지금도 그 화려한 모든 것을 거절하시고, 아니 그곳에 계실 수가 없어 억울하고 춥고 배 고프며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찢어지는 가슴 속에, 슬피우는 자의 구유에, 절망하며 생의 갈림 길에 서 있는 그 곳에, 병들고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음의 소리가 들리는 구유에 추워서 젖은 박스와 신문으로 몸을 가리는 나그네 노숙자들의 구유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고독하고 외로운 자의 구유에, 난민의 구유에, 가난한 고아 과부 의 구유에 오실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나누고 싶다.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