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평화통일을위한기독인연대] 평화를 말하는 히브리어 '샬롬'이나 인도어 '산티'같은 단어들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평화에 대해 말하는 반면, 헬라어 '에이레네'나 라틴어 '팍스'와 같은 단어들은 전쟁이나 적대감정의 부재를 평화로 보는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전쟁의 부재 정도를 평화로 말하는 그러한 평화를 우리는 소극적인 평화라 부를 수 있으며, 구원받은 삶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평화를 적극적인 평화 곧 '샬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샬롬'으로서의 적극적인 평화(positiver Friede)는 포괄적이며 총체적이기는 하나, 너무 추상적이며 막연한 느낌을 준다. 그러한 평화의 개념을 가지고는 우리가 오늘의 현실 가운데에서 구체적으로 평화를 위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평화연구가인 피히트(G. Picht)는 "평화란 모든 유토피아를 포괄하는 유일한 유토피아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포괄적인 것으로서의 평화의 개념 규정이 유토피아적 이상론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평화가 사회 실천적인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접근 가능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가 포괄적이며 넓게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좁은 의미로 또한 제한적으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평화를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태라는 제한적이며 구체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에서 규정한다. 우리는 이 같은 평화의 개념을 소극적인 평화(negativer Friede)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갈퉁(J. Galtung)은 "평화 연구란 폭력 사용의 원인과 조건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평화를 이와 같은 소극적이며 좁은 의미로만 보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건강을 단지 질병이 없는 것만으로 규정하려는 소치와 같다. 평화의 문제는 전쟁이 있고 없음의 문제만으로 연구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는 국제질서의 구조와 군비 경쟁에 대한 연구가 도외시된 채, 표면적인 국가 간의 갈등만을 분석하여 처리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국제 정치적, 국방 전략적인 갈등 분석이나 연구를 통해 위기를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평화 연구나 평화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며, 진정한 평화 연구란 국제적인 분쟁과 갈등을 낳는 위협 체제 자체에 관한 연구 분석으로서, 위협 체제 자체를 불가항력적이라고 전제해 놓고 가급적 갈등과 분쟁이 폭력으로 터지지 않도록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만을 연구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런 각도에서 평화에 대한 연구는 소극적인 평화에 대한 연구와 함께 적극적인 평화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평화의 문제를 좁게 정의하여 구체화함과 동시, 보다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 평화의 전체적 문화성을 수렴하여야 할 것이다.
글ㅣ노영상 목사(호남신학대학교 총장, 평통기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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