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연구원이 올해 마지막 강좌로 개설한 '바르트의 신학입문' 강독 세미나가 이달 8~29일까지 매주 월요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기독일보는 '바르트의 신학입문' 강독 세미나 첫 강의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칼 바르트가 1961~1962년 겨울 바젤 대학교에서 40년 간의 교수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강의한 내용을 묶은 '개신교신학 입문'. 이 책의 강독 세미나 강사로 초청된 신준호 박사(인천제일교회 교육목사)는 지난 10월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출간된 칼 바르트의 '개신교신학 입문'(복있는 사람)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신 박사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지도교수 미하엘 벨커 교수 아래서 공부하고 10년 후인 2006년 가을학기부터 2007년 여름학기까지그 대학 신학부에서 칼바르트 교회교의학을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 강의는 하이델베르크대학 설립 이후 최초로 동양인에게 맡긴 강의로 남아졌다.
신준호 박사는 먼저 "영혼, 영적인,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다"며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용어 중 하나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등장하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창조자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접촉점이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놀람'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등장하셨다 했을때 놀랐는가? 안놀랐는가? '이러저러하게 신학을 시작했는데 놀라지 않는 사람, 혹은 신학을 마쳤는데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사람, 더 큰 놀라움 안으로 빠져들지 않는 사람은 일단...' 그런 사람은 신학을 관둬라는 뜻이다"며 "이 예수 사건 앞에서 놀랄 수 없는 사람은 계몽주의고 이성주의다. '놀람이 없다면 신학 작업 전체가 뿌리로부터 병들수 있다'"는 칼 바르트의 말을 인용했다.
이어 신 박사는 '당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중립적 관계란 없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말씀 앞에서 놀랐는데 가만히 보니까 거리를 두고 내가 주체가 돼서 말씀을 객체로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씀이 정말 말씀이고 예수의 인격 안에서 정말로 하나님이 등장하셨다면 나는 사로잡힌 자, 놀라움에 사로잡힌 자가 된다. '그 객체는 주체에게 최후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것에 몰두된 사람은 놀라움에 사로잡힌 체포된 상태로 그 기적과 마주쳐 당황한 자가 된다'(83쪽)"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르트가 놀랐다고 하는 것은 신약, 구약의 역사에서 뽑아온 것이고 당황이라는 것도 성서를 배경으로 해야한다. 그 성서적 놀람, 당황을 거쳤던 사람들이 '최초의 증인들'이다. 최초로 예수의 인격에서 놀랐다. 그 사람들은 신약의 사도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와 마주쳤고 그 다음에 놀랐고 벗어날 길이 없었다"고 전했다.
신 박사는 "칼 바르트의 용어 중 하나를 뽑으라 하면 '최초의 증인들'을 들수 있다.이 증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부딪혔던 사람,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이다. 신약은, 사도들은 뭘 외쳤나 하면 여자들은 '그분이 다시 사셨다.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외쳤다. 또 '그는 그리스도시다'고도 외쳤다. 예수의 인격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등장하셨다는 그걸 봤다는 것이다. 그 표현을 사람마다 다르게 사도마다 다르게 그렇게 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분의 생명 안에서 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35쪽)
그는 "한 새로운 인간, 계속해서 한 '새로운 인간'이다"며 "그분이 나타나셨다는 단어, '나타나심'이라는 단어가 교회교의학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와 어떻게 만났을까? 죽음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죽음을 건너 다시 사신 한 인간과의 대면이었다. 제자들이 모여 있을때 죽음을 건너가셨다가 다시 건너오시는 그분이 영의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의 대면이고 인류와 하나님의 대면이다. 그것이 최초의 증인들이 대면한 것이다"고 소개했다.
덧붙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여자들은 얼마나 놀랐냐면 마가복음 16장 8절 이후에 보면 너무 놀라서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나온다. 실어증이 올 정도로 쇼크를 받는 사건이 하나님과의 대면이다. 그 여자들이 나중에 조금 있다 말을 전해서 사도들이 듣게 된다. 이 최초의 증인들이 하나님을, 주님 예수를 만난 것이다"며 "오늘날 영성 수련회 가서 영성을 받는 그런 대면이 아니다. 그걸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는 "그분들이 최초의 증인이고 그 증인들의 증거를,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 2차적 증인들, 공동체였다. 그 다음에 우리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듣는 3차적 증인들이다. 우리는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간접의 간접적으로 그 말씀을 전해듣고 있는 것이다"며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 교회에서 겸손을 많이 강조하는데 정말로 겸손해야 될 것은 믿음, 복음 앞에서 나의 위치에 대한 겸손이다. 내가 일차적인, 최초의 증인들의 자리로 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 증거의 서열을 뒤집으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초의 증인들은 최초의 증인들대로 하나님 앞에 해야될 사역이 있었고 2차 증인들은 2차적으로 기록을 남겨야 될 은사가 있었고 우리는 이 암울하고 부족한 시대에, 알수 없는 시대에 혼돈을 통해서 성서말씀을 겨우 의지해서 깨달아 해야 할 사역이 있다"며 "동일한 성령이 동일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에 간접적인 증인으로서의 어마어마한 의무를 지닌다. 최초의 증인들은 정치활동을 할 여유가 없어서 오직 '예수는 부활하셨다'만 떠들고 다니는 그것이 인생이어야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다른 분야의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성서적 증인들이 그 말씀에 대해 가졌던 관계와 우리가 갖는 관계는 비교될 수 없다 ...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만 2차적으로 다만 성서적 증거의 반사와 반향 안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신학의 자리는 최초의 증인들 옆에 혹은 동일한 비슷한 높이에 위치할 수 없다'(38쪽)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맞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말씀 옆에 비슷한 자리 그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세번째 관찰자에 불과하다. 단락 마지막 말처럼 '말씀에 대한 직접성 안에서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 맞지만 우리 인간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다. 성경을 너무 좌지우지 해온 것이 개혁신학의 문제였다"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맞지만 너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 개혁주의신학이 성경 증인들 앞에 맞먹어서 마치 성경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은 오만이다. 그 오만은 어쩌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일수 있다. 교회교의학에서 근본주의는 적그리스도다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신학자는 천문학, 지리학, 동물학, 심리한, 생리학, 양자물리학, 사회학 등등에 대해서는 성서적 증인들보다 더 많이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서적 증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며 "내가 성서적 증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이 계시는 여기도 나타나고 저기도 나타나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어디에도 구원이 있고 해서는 안된다"며 "종교철학은 이성의 관점에서 철학을 수행하니까 가능하다. 그러나 신학의 자리는 개신교 신학의 자리는 그것이 아니다. 내가 더 높아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서적 증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기껏해야 계몽주의적 종교철학, 이성 그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시대의 양자론도 해결 안된다. 양자론을 하려면 불확정성의 원리를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계몽주의하고는 전혀 다르다. 위치가 확정 되면 운동량이 확정 안되고 운동량이 확정 되면 위치가 확정 안된다는 것이다. 이건 과학의 진리다. 우리가 보는 시공간은 그렇게 생겨 먹었다"며 "계몽주의라고 하는, 수박 껍데기 밖에 안되는 그런 뉴턴세계관 안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세운다는 사람들도 말이 안된다. 그것 가지고는 세워지지를 않는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렇다고 종교다원주의나 문자주의를 만났을때 싸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차세대 바르트 연구자들은 부딪힐 상황에서는 '어머 환상적이네' 하지만 물어볼때는 대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우리는 성서 안에서 대단히 많은 다성의 증거를 듣는다. 종교다원주의는 계몽주의적이지만 다원주의 자체는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성서 자체가 다원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 안에서도 다원적이고 신약과 구약이 같이 있는 것도 다원적이고 신약성경 자체도 공관복음서들도 어마어마하게 다른 목소리, 다성의 증거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바르트는 '신학작업은 지치지 않고 돌아다니기다'(41쪽)고 말했다. 바르트한테도 갔다가 반틸에게도 갔다가 해야 한다. 여러 다른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심은 찾아야 된다. 중심을 못잡고 돌아다니면 너무 비효율적이고 시간낭비가 크다"며 "그 중심은 삶과 죽음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인 그곳은 하나님이 등장하신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여기에 "이 중심에 섰을때 '아 저 사람들은 지금 어디를 가고 있구나', '수성은 이렇게 돌고 금성은 이렇게 도는구나' 보이는 것이다"며 "이 중심에 서려고 이 책을 공부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