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장세규 기자] 서울시가 제정을 추진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최근 사실상 폐기되면서 이를 둘러싼 정치권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 인권헌장 제정위원의 편지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자신을 아무런 직함도 명함도 없는 평범한 '주부'라고 밝힌 시민위원 A씨는 9일 기독일보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불거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서울시민 모두가 공감하는 제대로 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제정되길 희망했다.
지난 8월 제정위원(시민위원)이 됐다는 A씨는, 우선 장애인으로서 '인권'이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 대해 "짧지 않은 인생 살아오는 동안 늘 '차별'에 대한 상처와 불편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내가 가서 한 목소리 보태어 뭔가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긴장된 설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A씨는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해 온 언젠가부터 혼란스러웠다"며 "특히나 강남과 강북에서 각각 열렸던 권역별 토론회와 공청회에 다녀온 후에는, 이 헌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구체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A씨가 가진 의문은 ▲차별을 받는 대상이 왜 성소수자만인가 ▲시민위원 150명에 전문위원 30명을 더한다 해도, 고작 180명의 의견이 과연 서울시민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가 ▲헌장은 구속력이 있는가, 이 세 가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먼저 시민위원 A씨는 '차별을 받는 대상이 왜 성소수자만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인권'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답게 살 권리. 정말 더 없이 좋은 의미"라고 정의하며 "그런데 저는 이번에 시민위원으로 일하면서, 여기서는 이 '인권'이라는 단어가 특정 부류, 특정 집단에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이번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끝내 합의가 안 된 부분은 '성소수자 차별금지조항' 포함 여부였다. 다른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A씨는 장애인 인권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온통 성소수자나 성적 취향 부분에만 집중하며 갑론을박(甲論乙駁) 토론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시민위원 A씨가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똑같이 '인권'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전문위원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제가 생각하는 '인권'이 다르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A씨는 "이곳의 인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직 성소수자들만을 위한 인권이었다"며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인권'으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결코 성소수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위원과 전문위원을 합한 180명의 의견이 과연 서울시민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시민위원 A씨는 의문을 제기했다.
A씨에 따르면 시민위원은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지만, 그건 지원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1천여 만 서울시민을 대표하는 의미로 본다면, 시민위원 한 사람이 서울시민 오만여 명의 의견을 대변해야고, 시민위원이 함께 만드는 이 헌장 안에 전체 서울시민의 뜻이 최대한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A씨는 "행정 편의상 시민위원을 선출해 회의 현장에서 일하게 한 것뿐이지, 그들 자체가 서울시민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서울시민의 의견들을 다각도로 듣고 수렴하여 헌장에 반영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시민위원 A씨는 이에 대해 "실제로, 그동안 인터넷을 통해 시민 여론을 수렴하기도 했고, 두 차례에 걸친 토론회에서도 시민의 의견들은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의견들은 헌장에 적극 반영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A씨가 가진 의문 '헌장은 구속력이 있는가'에 대해 그는 이번 시민의원에 지원하면서 가진 생각은 과거 한창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정도로 생각했다고 전하면서 그는 "그래서 이 헌장은 법률과 조례처럼 법적인 구속력을 갖진 않지만, 시민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인권의 내용을 담는 상징적 선언으로서의 의미로만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실제로 회의를 돕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도우미)도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심적으로 별 부담이 없었다는 A씨는 "그런데 회의 과정에서 '헌장의 이행'이라는 분과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A씨는 "헌장의 이행이라는 건, 결국 헌장에서 결정된 모든 사항을 실제로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규범과 기구 등 제도를 마련한다는 것인데, 더 나아가 인권교육과 홍보 그리고 이행 여부를 정기적으로 점검·평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며 그때서야 이건 단순히 '선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찜찜했다"는 것이 A씨의 고백이다.
A씨는 이같은 여러 의문 속에서도 지난달 28일 끝난 마지막 제6차 회의까지 성실히 참여했지만, 이상하게 회의의 원칙과 방향에 일관성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전문위원들은 사회자나 간사 역할만 한다고 했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중립'을 벗어나 직접 의견도 내고, 분과 총무 선출에도 관여하고, 그들 원하는 대로 방향을 종용했다"면서 "전문위원 수도 어느 틈엔가 늘어났고,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던 전문위원이 총무단회의 때 참석해 표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고 밝히며 "투명하지 않은 이런 행태가 결국 불신이 됐다"고 말했다.
편지의 결론에서 시민위원 A씨는 ▲서울시민 인권헌장에서 말하는 '인권'이 보편적인 인권이 아니라, 오직 성소수자에 편중된 인권을 주로 의미하고 있기에 다수의 '진정한 인권'으로 담아내지 못한 점 ▲성소수자 관련 조항은 아직 사회적 합의와 공감이 되지 않은 점 ▲마지막 6차 회의 때 표결을 반대하는 일부 위원들이 퇴장한 후, 남은 시민위원들끼리 모여 표결된 '60:17'이라는 결과는 서울시민 전체의 뜻이라고 주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며 이 헌장은 결코 서울시민이 함께 만든 헌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