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지난달 25일 진행한 '초기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프로젝트' 제1회 길보른기념강좌에서 서울신대 목회신학연구원 원감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가 발제한 '어니스트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박문수 박사는 어니스트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의 회심 체험을 소개하며 "어니스트의 회심에는 회사 동료였던 찰스와 레티 카우만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결혼 후 어니스트 길보른은 미래가 없어보이는 서부의 버지니아를 떠나 웨스턴 유니언사(社)의 시카고 사무소로 전근을 요구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오래되지 않아 그는 전신 기사(telegraph operator)들을 1,000명이나 관리하는 기사장(a division chief)이 되었다. 당시에 같은 지위에 있는 다른 기사장이 있었는데 바로 찰스 E. 카우만이었다"고 소개했다.
찰스 카우만의 회심 과정은 찰스 카우만이 하늘로 부르심 받기 전에 작성하던 미완성의 자서전에 들어있는 '타락한 자의 회심'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소개했다.
"그녀와 내가 19살의 동갑 나이에 결혼을 하고 본격적인 삶을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결혼한 후 아내의 병 때문에 시카고 전신회사 사무소로 이전하게 되고 뉴욕 전신기사장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세속적인 사회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의 종교훈련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데 1891년까지 그것이 지속되었다. [중략] 1893년 한 크리스천 사역자가 이웃에 있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에 우리를 초청했다. 한 회심한 오페라 가수가 와서 간증을 하고 노래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내는 음악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 [중략] 이것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한밤에 노래하는 것 같았고 세상의 만족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에게 영적인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같았다.[중략] 그녀는 육백명의 성도가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어느 주일에는 부흥회가 진행되었고, 그녀의 간청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헨리 오스트롬 목사가 설교자였다. 그가 설교하 는 동안 어릴 적 정겹던 시골에서 부흥회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고, 13살 때 에 회개자석에 있었던 기억이 났다. [중략] 그리고 마음속에 절실하게 생각났던 것은 나의 보잘 것 없는 기도를 통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을 때와 주님이 아내를 살려주시면 내가 그분을 위해 헌신하겠노라고 주님께 약속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내는 나에게 교회 제단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했으나 완강히 거절했다. 아내가 혼자서 제단 앞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회심자들 사이에 섰다. 그러나 나는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가 우리 사이 를 영원히 갈라 놓은 것처럼 아내가 없는 완전한 외로움을 느꼈고 마음이 아팠다. '예수를 신뢰하고 그에게 굴복하라. 그리고 가라'는 어떤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렇게 할 힘이 없었다. [중략] 우리는 열두 블록을 걸어 서둘러 우리 아파트에 들어갔고, 불을 켤 시간도 없이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방탕한 세월을 주님께서 가져가시기를 청하면서 나의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 채 한 달도 안 된 나의 사랑하는 아내는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성령님은 나의 과거가 주님의 보혈 아래 있고 내가 다시 한 번 그 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그 방랑자는 다시 그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박문수 박사는 "찰스와 레티 카우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기쁨을 깨달은 후, 찰스는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신앙을 증거하기 시작했다"며 "어니스트 길보른은 카우만이 전신회사에서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찰스 카우만의 자서전, 『동양 선교회 창립자 찰스 카우만』( Missionary-Warrior: Charles E. Cowman )을 출판한 레티 카우만의 글을 통해 길보른의 회심 사건을 소개했다.
"그(찰스)가 맨 처음으로 영혼을 구한 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평소 때처럼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에게 영적인 행복에 대해 전하리라 마음을 먹고 사무실로 갔다. 기사들은 몇 시간 동안 각 자의 전화선을 붙잡고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시간이 몇몇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긴 방 한쪽 구석의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그에게는 분명히 여유시간이 있는듯 싶었다. 그와 이야기하려고 용기 내어 말하기 전에 찰스는 그 방을 이리저리 걷고만 있었다. 결국 그는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의 책상 옆에 서 있다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중략] 찰스 카우만은 그날 밤 영혼구원에 관한 첫 번째 시도에 낙담한 마음으로 그의 사무실을 떠났다. 그러나 다음날 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맨 처음으로 나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오, 나는 당신께 놀라운 사실을 말해 줄 것이 있어요' 지난밤에 이야기 해주었던 그 젊은이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다가오며 말하기를 '저는 지난 밤 당신과 대화 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말해준 대로 했는데 모든 것이 안정되었습니다. 나를 그리스도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어니스트 A.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이었다. [중략] 바로 그날 찰스 카우만과 어니스트 길보른은 평생의 우정관계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동반관계가 성립되었다."
박문수 박사는 이어 "길보른이 자신의 회심에 대해 기록에 남긴 것으로 판단하면, 카우만이 회심한 후 1년쯤 지나 발생하였다. 그것은 1895년 후반이 아니면 1896년 초반이었다"며 "이제, 어니스트 길보른은 모든 에너지와 야망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카우만이 출석하던 '그레이스 감리교회'(the Grac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에 입회해 이로써 길보른은 잃어버렸던 유년기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불타는 신앙의 열심으로 그는 찰스와 함께 직장, 거리, 공원 등지에서 전도할 수 있었다"며 "카우만과 길보른은 남는 시간을 영혼구원 활동에 투자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미션 홀들을 자주 찾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간증했다. 그들은 복음전도 문서들을 나누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지나는 길을 따라 우편함에 전도지를 넣어두곤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1894년 시카고의 무디 성서교회에서 열린 선교대회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며 "그때 주 강사였던 기독교연합선교회(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의 창립자 심프슨 박사가 '아내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직 믿음만으로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 선교한 젊은 사업가'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 집회에서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덧붙여 박 교수는 "길보른의 아내도 역시 이때를 전후로 또한 회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그녀를 아는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숨은 봉사자'(hidden servant)로 평가했다. 레티 카우만 여사의 기질이 적극적이었다면, 반면에 그녀는 조용히 섬기는 기질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1917-1918년에는 10명의 젊은 전도대원들이 일본 전역을 누비고 동경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따뜻한 식사와 뜨거운 목욕물, 그리고 말끔한 세탁물로 그들을 대접하였던 일은 여러 사람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길보른은 역시 무디 성서학원 야간반에 등록해 카우만 부부가 한 것처럼 시간제(part-time)로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며 또 "1897년에는 길보른을 따라 그들은 회심한 전신기사들 가운데서 주일 오후예배를 드리고 동시에 다른 기사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한 단체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후에 '전신기사선교단'(Telegrapher's Mission Band)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배 후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하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하고 사무실로 되돌아갔다"며 또한 "주일 오후예배 후 한 달에 한 번 만나 20달러 가량의 소박한 헌금을 선교를 위해 내놓았다"고 했다.
박문수 박사는 "그리고 미국 전역의 전신기사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초대 회장에 는 찰스 카우만이 맡았고 길보른도 전신과 편지, 그리고 직접전도를 통해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였다"며 "어니 부부는 카우만과 길보른은 전신국을 마치'하 나님이 지명하여 보내신 사역지'로 여겼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신기사선교단은 나중에 극동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단 중의 하나인 동양선교회(OMS)의 기초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1901년 2월 21일 찰스 카우만은 일본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나까다 쥬지 목사와 함께 '예수교복음전도관'(Jesus Doctrine Mission Hall)이란 간판을 내걸고, 성서학원과 함께 복음전도관 운동을 시작했다.
이어 1년 후 어니스트 길보른 가족이 카우만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건너와 동양선교회 부총재로서 카우만 선교사를 도와 일본선교를 돕는다.
동양선교회라는 명칭과 조직이 확정된 것은 1905년 11월이었다. 동양선교회가 조직된 다음 달인 1905년 12월, 일본어로 발행된 「불의 혀」에는 동양선교회의 창립정신과 목적을 이처럼 설명해놨다.
"(동양선교회는) 동양 여러 나라에 순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라 안팎의 성도들로부터 조직된 단체입니다. 종래의 성서학원과 그리고 각지의 복음전도관은 본회에 부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본 또는 외국에 있는 어떤 단체, 그리고 어떤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사중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고 웨슬리안 계통임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본 회의 목적은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교화(전도)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결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곧 주의 재림에 대한 준비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중복음이라고 일컫는 구원, 성결, 주의 재림, 신유를 주장합니다. 구원이란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서 즉시 죄는 용서되고 의롭다함을 받아 새로나서(신생)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이며, 성결이란 온전히 헌신하고 주의 보혈을 믿음에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죄의 뿌리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이며, 주의 재림이란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이 재림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주께서 오늘 밤이라도 성도들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공중에 나타나고, 그리고 성도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오셔서 천년동안 전 세계를 지배하시는 일이며, 신유란 어떤 병 이라도 낫게 되는 일입니다(...) 교리는 대략적으로 말하면 웨슬리씨가 말씀하시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그 한 마디 한 구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만을 신앙의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복음전도를 강조했다. 이들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지만 기존 신자라도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하거나 사중복음을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동양선교회는 만국사도성결연맹의 분리 조직으로 독립선교단체였지만 만국사도성결연맹은 동양선교회를 동양을 위해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하나의 출구로서 고려하며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자유로운 헌금으로 도왔다. 그러나 만국성결연맹은 동양선교회의 사역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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