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11일 서울 양천구 목동 지구촌교회(담임 조봉희 목사)에서 개최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개교 34주년 기념 제26회 정암신학강좌에서 이남규 교수(조직신학)는 정암 박윤선 박사의 마지막 훈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팔츠(하이델베르크)교회의 신앙교육'을 주제로 발제를 시작했다.
"'나'자신을 바로 취급할 것, 즉, 나는 주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 하이델버그 신앙고백서의 문답에,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나는 영육의 생사에 있어서 진실하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사실입니다(고전 6:19-20)'라고 하였다"
이 교수는 "이 말은 1988년 2월 정암 박윤선이 자기 생애 마지막 졸업식에서 '하나님을 사랑합시다'란 훈사에서 한 말이다"며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1문답이 마음에 담겨 있었던 이 훈사는 그의 마지막 훈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팔츠 지역을 넘어서)빠르게 세력을 확장해간 가장 큰 이유는 신학적 용어보다 주로 성경에서 나오는 보편적 용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과 언약과 섭리의 신학적 내용들을 포기하기 않고 가르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기독론과 성만찬론에서도 개혁교회에서 가르쳐왔던 내용들을 선명하게 드러내되 보편적 용어들을 사용했다"며 또 "전체 내용이 잘 구성되어 논리적으로 연결되면서도 아름다운 운율로 되어 있어서 청소년들이 쉽게 암송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남규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만들어진 팔츠 지역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 전역에 퍼져갈 때 겉으로는 로마 가톨릭을 유지하면서도 종교개혁이 암묵적으로 허용됐던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1556년 새로운 선제후가 된 오트하인리히 때부터였다..
이 교수는 "오트하인리히가 팔츠를 물려받기 전해인 1555년 9월에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 평화협정의 핵심적인 내용은 '그의 지역에는 그의 종교'이다"며 "따라서 1556년에는 종교개혁에 따른 정치적 위험성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오트하인리히는 같은 해 미사를 금지하는 임시명령을 내렸고 얼마 후 새로운 교회법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오트하인리히가 팔츠를 통치하는 기간은 종교개혁 진영이 성만찬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해 이 긴장이 유럽전체에 커져가고 있던 때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그는 교수는 "성만찬의 떡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한다는 루터주의자들과 여기에 반대하는 스위스 진영이 점차로 갈라지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던 중 "1561년 1월 나움부르크에서 개신교 통치자들이 모여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개신교 신앙을 다시 확인하려 하는데 1530년에 나온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비변경판과 1540년에 나온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변경판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로 토론이 벌어졌다"며 "이 두 판의 가장 큰 차이는 성만찬론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1530년 판(CA)은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아래 현존한다'라고 해서 강한 루터파의 주장에 가까이 있다"며 "반면 1540년 판(CAV)은 '빵과 잔과 함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제신된다'라고 해서 개혁파도 받아들일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협정에 의해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 둘 다 허용됐는데, 개신교의 경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는 것이 조건이었다"며 "사실 그때 사용된 신앙고백서는 1540년 판이었으나 강한 루터파 지역의 통치자들은 1530년 판만을 받아들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개혁주의 노선으로 마음을 정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당연히 변경판을 마음에 들어해 감동적인 연설로 1540년 판도 함께 인정받도록 했다"고 말하며 "팔츠교회는 비록 개혁주의로 노선을 정했으나 교회에는 여러가지 개혁의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팔츠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없앤 예배모범이 포함된 교회법과 바른 내용을 가르칠 교안인 요리문답서가 필요했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