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 가을학술대회가 지난 8일 '개혁된 교회에서 개혁하는 교회로'를 주제로 개최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를 비롯해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남서울대 성암기독사상연구소,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에서 공동주최했다.
이날 오전부터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 '루터의 윤리와 현대교회의 개혁과제-신학적 소통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제한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박사는 먼저 "16세기 종교개혁사를 통시적 시각으로 보면 잘못된 교리를 다잡기 위한 토론에서(95개조 논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할 점이 있다. 루터는 단순히 탁상 위에서 궤변을 펼치기 위한 이론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며 "그러기에는 당시 교회의 유럽의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또한 이 관심은 절박한 신학적 물음, 즉 부패한 교회와 부정의한 현실의 직시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며 종교개혁사에 나타난 다양한 소통의 윤리를 소개했다. 그는'종교개혁은 소통의 혁명'이라는 명제를 세우며 한국교회개혁의 과제로 '신학적 소통'을 강조했다.
■ 루터의 소통 능력, 라틴어의 담으로 막힌 중세시대 뚫고 나간 힘
최주훈 박사는 "중세시대는 종교적 권위가 교황제도에 집중된 중앙집권시대였다. 이런 중앙집권적 권위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근간은 '언어'였다. 오로지 그 독점은 라틴어를 통해 유지되었다. 뒤집어 말하면 교회 권력에 있어서 라틴어가 아닌 속어의 사용은 그 자체가 잠재적 이단이자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성서번역과 해석에 대한 문제이다"며 "119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프랑스인들이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기를 원한다는 교회의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인용했다.
"신앙의 깊은 뜻은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할 게 아니다. 사실 모든 곳에서 모든 이에게 이해되는 게 아니라, 이해력을 지닌 신도만이 이해하는 것이다. ... 우둔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 성서의 숭고한 뜻에 도달하려 하거나, 이를 타인에게 설교하려 해서는 안 된다. ...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모든 부위가 같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도 여러 직분이 있으나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들은 학식이 있는 우수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아무나 스스로 이런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그는 "당시 소통이 가로 막힌 중세사회의 단면이다"며 "문화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에 의하면 루터는 독일어와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지식인과 비지식인층 모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루터의 소통 능력이 라틴어의 담으로 막힌 중세시대를 뚫고 나가는 종교개혁의 폭발력을 가져 왔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최주훈 박사는 "1517년 가을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를 비판하는'95개조 논제'를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파급력은 극도로 미약했다. 이 단계에서 루터는 단지 성직자와 대학사회 내부에서만 논의할 의향이었다"며 "그러나 이듬해 봄 독일어 해설서와 함께 인쇄 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2주일쯤 지나자 도처에서 대중들이 읽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고 했다.
최 박사는 "이 소통의 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속화 되었다. 1520년 루터의 3대 논문이 나오게 되자 폭발적인 판매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벨론 포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이 이 셋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의 경우 출판된 지 며칠 만에 4,000부가 매진되어 15판을 더 찍었다"며 "이 논문은 독일어 성서 다음으로 -95개조 논제보다 훨씬 더- 많이 읽혔고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출판물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고 소통의 파괴력을 가진 것은 단연코 루터의 성서 번역이었다.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이 번역 출판 되었을 때는 '9월 성경'으로 불리는 초판이 3,000부 인쇄되었고, 일찌감치 같은 해 12월에 제2판이 나왔으며, 이후로 11년간 고지독일어로 14회, 저지독일어로 7회 중판을 냈다. 루터가 살아 있는 동안 모두 10만부 이상 인쇄되었다"며 "1534년 루터의 신구약 완역본이 나온 이래로 1622년까지 85판을 찍어 냈다"고 했다.
덧붙여 "물론 루터 이전에도 책이나 판각화 같은 출판물들이 있었지만 이것들이 중세 신앙의 형태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 중에는 신화나 전설을 다룬다든지 경건서적이나 신앙에 관한 단편집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신앙 양태까지 변혁하지 못했으며 그 시장도 폭이 좁았다"며 "그러나 종교개혁 사상을 담은 글들은 종교, 문화, 산업이라는 모든 시장에 반향을 일으키며 출판시장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최 박사는 "물론 당시 문맹률을 고려한다면 활자체계와 발을 맞춘 종교개혁의 폭발력은 반감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며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린 아이들과 문맹인들을 위한 기초교육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루터의 '소교리문답서'(1529)이다. 이는 당시 높은 문맹의 사회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문맹률을 현저히 낮추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이와 더불어 루터의 글들은 대중들이 모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읽혀지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이를 통해 민중 속으로 종교개혁의 사상들은 파고들게 되었다"며 "물론 당시 독일에서도 루터를 반대하는 지역들이 있었다. 공개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지역들에서는 비밀리에 개혁자들의 글과 성서를 함께 읽고 공부하는 공동체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 공동체들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로 공식적으로 편입되면서 중세신앙과는 구별된 신앙공동체로 승화해 나아갔다"고 덧붙였다.
■ 예배의 언어도 회중의 언어·민중의 언어로...교회 곳곳서 '소통의 혁명'
이어 "이런 흐름은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예배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민중의 언어가 자리 잡는다. 여기에는 회중이 함께 화성을 넣어 부를 수 있는 '코랄'(Coral)이라고 불리는 회중찬송의 시작도 한 몫을 했다"며 "이와 같은 예배 개혁을 통해 종교개혁교회는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고 교회 생활은 사제와 회중이 공동 참여하는 예배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최주훈 박사는 설명했다.
또한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공동체는 삶의 구체적인 영역까지 변화시켰다. 그 결과 교회공동체의 모든 재산을 사회 복지 차원으로 환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틀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며 "예를 들면 헌금의 사용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는데1522년 1월 24일자 '비텐베르크 시 규정'은 '공동재산금고'(Gemeine Kasten)를 만들어 성직자 봉급의 일부와 교회재산, 시민조합재산의 수익을 함께 모아 도시 빈민과 퇴직한 성직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했다"며 "공동재산금고가 특별한 이유는 이 금고의 열쇠를 목사대표, 교회 평신도 대표, 시청 대표가 나누어 갖고, 이 셋이 합의하여 세 열쇠를 동시에 넣어야만 금고가 열릴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고 소개했다.
또 "교회직제의 개혁에서도 이와 같은 소통의 혁명은 감지된다"며 "1523년 가을 비텐베르크시의 첫 개신교 목사인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1485-1558)의 목사 청빙은 주교의 안수권(Weihe: infusa gratis)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과 달리 삼자구도의 청빙에 의한 임직(Ordination:서임)으로 성립되었다. 교회(목사대표, 평신도 대표), 대학(교수 대표), 시청(교회공동체 외부의 시민대표)으로 구성된 10인의 청빙위원회의 추천과 청빙을 통해 서임되었는데, 이는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 목사란 교회, 대학사회, 시민사회 어느 곳에서건 신뢰와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소통은 본질적으로 종교개혁 실천 강령의 핵심이 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 복음을 담고 있는 성서의 말씀은 구교회가 전유하고 있던 성직자 중심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진리를 향한 종교적 담론을 풍성하게 만들었다"며 "폐쇄적이고 일방적으로 선포되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만으로'의 원리에 따라 질문과 토론이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신학의 발전과 신앙인의 삶의 자리도 변혁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 타자에 대한 사려 깊은 귀 기울임, 종교개혁 역사의 가르침
최주훈 박사는 '신학적 소통의 현실'에 대해 말하며 "신학 강의를 위해 여기저기를 다녀 보면, 특별히 보수적인 교파, 소위 '정통'을 주장하는 곳일수록 교회는 일종의 '이데올로그(ideologue, 이데올로기 숭배자)들의 모임'이란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각 교파가 교리를 만들어 자기 신앙고백 전통을 '도그마화'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며 "그러나 도그마에 갇혀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들어보지도 않으려는 '폐쇄적 교조주의'가 만연한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신교회에서 가톨릭의 신학을 들어보지도 않고 이단으로 매도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자기만 '정통'이고 남들은 모두 이단으로 주홍글씨를 새기는 일을 필자는 여러 번 경험했다"며 "교조주의는 일종의 폐쇄적 신념체계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나쁜 신학은 필연적으로 진영논리로 발전하게 되고, 자기 진영에 속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적 성향을 띠게 마련이다"고 우려했다.
그는 "가톨릭 vs 개신교, 칼빈 vs 루터, 칼빈 vs 웨슬리라는 대결구도가 신학의 현실이다. 차마 웃지 못할 상황은 칼빈주의건, 웨슬리주의건, 루터주의건 간에 자기 신학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는 것이다"며 "이런 곳의 특징은 폐쇄적 순환논리만 있을 뿐 주위 환경과 도전에 눈과 귀를 막고 소통이 없다는 데 있다"고 했다.
최주훈 박사는 '신학적 소통을 위한 제언'을 하며 "앞서 언급했던 신학대학 안에서 만나게 되는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그들의 문제는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대학 총장의 합의를 통해 커리큘럼의 조정이 현실화된다면 미래를 위한 첫발걸음을 훌륭히 뗄 수 있을 것이다"며 "'커리큘럼의 조정'이라함은 교회사나 조직신학 과목에서 각 '교단 신학자들의 교차 강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각 교단신학자들의 상호 교차강의를 통해 학생들은 교회분열과 일치의 사건을 상호 비판적으로 학습하게 될 것이고, 이는 자연스레 교회 현장까지 아우르는 신학적 소통의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며 이러한 '다양한 신앙고백의 유형과 신학의 차이'를 접하는 기회는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덧붙여 "물론 타교단의 신앙고백적 전통을 교육하고 교육 받는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사려 깊은 귀 기울임은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교회일치 운동의 정신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역사가 가르쳐준 소통의 윤리에 있어서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