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목회하고 싶은 교회는 어떤 교회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습니다. 목사로서 어떤 교회를 목회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지요. 제게는 '목회하고 싶은 교회'는 없고 대신 '다니고 싶은' 교회는 있습니다.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교인 전부가 목회자인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주보 표지엔 '담임목사'는 저이고 '목회자는 모든 교인'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교인이 목회자인 교회라는 겁니다. 정말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일까요? 모든 교인이 목회자인 교회일까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게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고 목표이긴 하지만 아직 거기에 이르진 못했습니다.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모든 교인이 목회자인 교회입니다.
저는 안수 받은 목사로서 해야 할 의무를 교인들에게 미루려 하는 걸까요?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습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일들 가운데 대부분을 교인들에게 미루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그 일들이 하기 싫어서는 아닙니다. 거기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개신교가 갖고 있는 여러 병폐들의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목사 중심주의'라고 말들 합니다. 저도 여기 동의합니다. 목사, 특히 담임목사에게 모든 권력과 책임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교회에 만연된 병폐의 뿌리입니다. 담임목사 한 사람이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들었다 놨다 합니다. 이건 대형교회든 소형교회든 마찬가지입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교회는 곧 목사가 하기 나름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바뀌면 모든 게 바뀝니다. 이게 주위에서 많이 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 교회의 운명이 목사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리고 목사로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생각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오래 전에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중요했습니다. 뭘 믿어야 정통이고 뭘 믿으면 이단인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절대로 이단의 꼬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요즘 한참 말썽이 되고 있는 구원파 유병언은 이단입니까? 기독교계 뿐 아니라 기독교와 무관한 사람들도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칭하는 데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정통 기독교와 구원파가 정말 그렇게 다릅니까? 다르면 얼마나 다릅니까? 제가 보기엔 대체로 비슷한데 교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구원파가 정통 기독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차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는 않다고 봅니다. 정도의 차이일 따름이란 겁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정통이 이단 되고 이단이 정통이 된 예가 적지 않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가 그 예입니다. 1970년대까지 '정통' 기독교는 조용기 목사를 '이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가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교회를 이단이라고 부릅니까.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달라졌을까요? 권력과 돈 때문입니다. 그들이 노선을 바꾸겠다고 천명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교세가 커지고 돈이 많아지니까 그들을 이단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단은 피해야 하겠지만 정통이라고 해서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정통을 영어로 'orthodox'라고 부릅니다. '올바른 가르침'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에 못지않게 'orthopraxis'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올바른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실천'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는 것' 곧 예수님처럼 사는 것, 예수님이 추구하셨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진정성과 자발성
다음으로 저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려서 다녔던 교회에서는 '보수신앙'을 지키는 걸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진보적인 교단으로 옮겼고 여태껏 진보적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저더러 '보수적'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어디를 봐서 보수적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불쾌해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기서도 상당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사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물론 보수에도 내용이 있고 진보에도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가장 왼쪽에 서서 바라보면 세상 모든 게 보수적이고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모든 게 진보적입니다. 그래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추구하는 가치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와 관련해서 정통과 이단, 보수와 진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성'과 '자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성은 거짓 없이 마음과 몸을 다한다는 뜻이고, 자발성은 그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뭔가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걸 가리킵니다.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진정성과 자발성을 가진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연기자와 관객으로 나눠져 있지 않는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몇 사람은 열심히 연기하고 연주하는 반면 다수의 사람들을 그걸 구경하는 교회, 이것은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가 아닙니다.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모두가 연기자이고 모두가 관객인 교회입니다.
연극이 됐든 영화가 됐든, 아니면 연주가 됐든 연기자/연주자와 관객이 명확하게 갈라져 있는 공연에서 관객이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조는 일이고 둘째는 감동받는 것이며 셋째는 비평하고 비판하는 겁니다.
지금 같은 설교 시간은 제가 연주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 어떤 연주든 연주를 보면서 조는 건 연주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그걸 좋아할 연주자는 없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제가 설교할 때 조는 사람이 눈이 띠면 기분이 좋지 않고 설교하기 싫어집니다. 설교를 비평하는 얘기도 별로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나마 비평의 내용에 공감이 가면 낫지만 거기 공감할 수 없다면 더욱 기분이 안 좋습니다.
저는 설교를 듣고 감동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설교를 듣고 감동받았다고, 은혜 받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냐고요? 물론 과거엔 그랬습니다. 우쭐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교회가 연주자와 관객으로 나눠져 있는 상태에서 관객이 제 설교를 듣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무대에 올라와서 같이 연주하는 게 더 좋아졌습니다. 물론 동시에 모든 교인이 무대에 올라와서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각기 연주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야겠지요. 교회는 이 모든 연주들이 합쳐져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곳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뭔가 얻으려고 오는 데가 아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교인들이 뭔가를 얻으려고 나오는 데가 아닌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교회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나오는 데가 아닙니다. 신앙은 뭔가를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의심 받습니다. 믿음이 있어서 교회 다니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니까 다닌다니 의심받는다는 게 무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 다닌다.'면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은 크게 비난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게 사업을 위해 나오는 것보다는 더 고상해 보이고, 또 종교는 마음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대개는 '영생을 얻기 위해 교회 다닌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목사와 교인들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잘 믿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상 이득을 얻으려고 교회 나오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 마음의 평화 얻으려는 게 왜 잘못이냐고요? 더욱이 영생 또는 구원을 얻으려 교회 나오는 게 문제라면 어쩌란 말이냐고요? 그렇습니다.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든 교회에 뭔가를 얻으려 나온다면, 뭔가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에서 어긋난다는 말씀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이나 영생을 획득하기 위해 다니는 데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키포인트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부자이고 지도자인 사람이 예수께 와서 질문한 것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답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들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해오던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는 몹시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했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예수께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대답하셨다는 겁니다.
영생이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다!
저는 이 에피소드를 수없이 많이 읽었지만 그 동안 건성으로 읽었음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조금만 쓰면 발견할 수 있었던 걸 간과해왔던 겁니다. 우선 질문을 갖고 예수께 온 부자 지도자와 청중들이 '영생' 또는 '구원'이란 말을 사용한 데 번해서 예수님은 끝내 그 말을 쓰지 않고 '하나님나라'란 말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했는데 청중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둘의 차이를 무시하시는 듯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가 영생을 얻는 길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아니라고 이해합니다. 질문은 영생을 얻는 길이었지만 대답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다'란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과 훗날 기독교인들이 관용적으로 사용했던 표현으로서 저 하늘 어딘가에 있는 천당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의 일원이 되다' 또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으며 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일원이 되는 건 뭔가를 소유함으로써 성취되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만일 지도자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랬다면 예수님은 "넌 가진 게 없으니 나눠줄 것도 없겠지. 그러니 넌 그냥 나를 따르면 되겠다."라고 말씀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곧 그가 걸어야 할 신앙의 길이자 예수를 따르는 길은 갖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래야 영생이든 구원이든 얻을 것이란 말씀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나라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뭔가를 얻어야 하나님나라 백성의 자격을 갖추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걸 내려놓아야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이렇듯 재물이든 마음의 평화든 구원과 영생이든 뭔가를 얻으려 바득바득 애쓰지 않고 뭔가를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나라 백성 됨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목사 없는 교회=모두가 목회자인 교회
마지막으로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직업적인 종교전문가가 없는 교회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에서 월급 받는 목사가 없는 교회가 제가 다니고 싶은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목사가 없는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말입니다.
저는 모든 교인들이 진정성과 자발성을 갖고 교회 안팎의 일에 참여하고 있어서 전문적인 목회자가 필요하지 않은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우리 주보 표지에 쓰인 대로 '목회자=모든 교인'인 교회 말입니다. 전문적이고 월급 받는 목회자가 있으면 그 사람 혼자 연기하고 연주하고 나머지는 관객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설교와 성경공부는 누가 인도할까요? 저는 교인들 중에서 거기 소질 있는 사람 한 명을 학비 지원해서 신학교에 보내면 된다고 봅니다. 그가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 읽는 방법을 배우는 등 전반적인 공부를 하게 하는 겁니다. 그 비용을 교회에서 대야겠죠. 그러고 나서 그가 예배 중에서 설교를 맡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겁니다. 나머지 교회 일은 각 방면의 소양과 성의를 가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거죠. 만일 설교와 성경공부를 맡은 이(그러니까 보통 교회의 목사)가 이런 일들을 위해 과외로 시간을 써야 해서 생업에 지장을 받는다면 그만큼은 교회가 보조하면 된다고 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교인들이 진정성과 자발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처럼 '구경꾼'이나 '관객'에 머무른다면 이런 교회는 불가능합니다. 교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교회 일에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주일에 한 번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 하고 더 이상 교회 일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교회는 현재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교회가 지금 이대로 가면 결국 짠맛을 잃고 땅에 버려지는 소금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번성할 겁니다. 더 커질 겁니다. 사람의 욕망이 커짐에 따라서 교회는 더욱 대형화될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교회일까요? 그걸 교회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까? 그게 예수의 교회, 맞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건 예수 없는 교회이고 예수를 내팽개친 교회 아닌 교회요 교회의 외양은 갖췄지만 속에는 탐욕으로 똘똘 뭉친 탐욕 덩어리일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마음으로 교회 다닐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며 탄식할 분이 적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를 얻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를 얻으려는 욕망으로 교회 문턱을 넘어섰다 하더라도 교인들이 뭘 믿고 어떻게 사는지를 보면서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데 '올인' 하지 말고 예수를 사는 일에 더 집중한다면 사람들은 변할 겁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고 우기는 일에 열심 내지 말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 특히 사랑에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더 집중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늘 올바른 삶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삶은 잘못된 지식을 고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우월하지 않아서 예수를 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우월해지려고 예수를 사는 걸 포기하는 게 문제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믿지 맙시다. 모난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시대의 위선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위선을 비판하는, 스스로에 대해 예언자가 됩시다.
예수의 교회는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만 삼는 교회가 아니라 그분이 삶의 모델이 되는 교회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사는' 교회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그 위를 걸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님을 명심할 일입니다.
저는 이런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이런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요? 그런 교회가 있다면 당장 그리로 가겠다고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니는 향린교회를 그런 교회로 만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찾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괜히 방황하지 말고 지금 다니는 이 교회를 그렇게 만들어보자는 말입니다. 저는 그게 훨씬 더 쉬울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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