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동안 약 2만 개의 놀이터 디자인에 참여해온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크가 세계인권도시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공공놀이터 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한국의 놀이운동가 편해문 씨는 일주일 동안 전국의 여러 강연과 놀이터 참관 여정에 동행한 후 최근 인터뷰를 진행했다.
- 아이들은 길과 거리에서 놀면서 큰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특정 구역에 자리 잡은 놀이터가 만들어진 것은 근대 이후로 알고 있다. 유럽에 많은 놀이터를 디자인하신 입장에서 놀이터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슨 뜻인가?
오늘 호텔에서도 보았듯이 그곳은 어른들을 위한 장소이지 아이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놀이터를 만드는 것은 "이제 너희는 여기서만 놀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다른 문제는 아이들이 놀이터에 갔을 때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놀이터를 만들지 않는 게 낫다. 만들 거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좋은 장소에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 놀이터에 대해 아이들과 부모의 시각이 서로 다른 것 같다.
부모는 놀이터를 만들거나 아이를 놀이터에 보낼 때, 그곳에서 뭔가 배우기를 바란다. 부모는 놀이터마저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은 친구를 만나고 자기들끼리 규칙도 만들면서 놀려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놀이터에 대한 부모와 아이들의 완전히 다른 관점이다.
옳은 말씀이다. 놀이는 아이를 속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놀이 속에서 만나는 것들은 노는 만큼 아이에게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아이들을 속이고 있다.
왜 놀이가 아이들을 속이지 않느냐면, 아이들에게는 놀이 자체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판타지가 있고 상상력이 있다. 그 순간순간이 아이들에게는 진실이다. 아이들이 공주 놀이를 할 때, 그 아이는 공주 자체이지 그런 말을 하는 아이를 바보 같다거나 어리석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반면에 교육은 그것을 파괴한다. 놀이는 삶을 가르치지만, 교육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삶과 관련 없는 것을 너무 오래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실수를 하면서 배운다.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데 왜 자꾸 가르치는가. 아이들은 답을 해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답을 해주는가. 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가. 아이들이 물어볼 때만 가르쳐주고, 물어보지 않는 한 대답을 하면 안 된다.
- 아이들이 놀기를 바란다면 부모와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들은 뭔가를 하면서, 놀면서 배운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복잡해져서 아이들이 놀기에 공간이나 장소가 충분하지 않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싸우는 방법이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그걸 풀어가는 방법을 배운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놀이에서 배울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가 놀고 싶을 때 노는 것이지, 부모나 교사가 놀라고 해서 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놀이에 대한 부모와 교사의 태도는 잘못되었다. 이건 좋은 놀이고 저건 나쁜 놀이라고 구별하고, 이 시간에는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한다고 정해주지만 아이들은 놀고 싶을 때 놀 뿐이다. 놀이라는 것은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것, 배고플 때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시간을 정할 수 없다. 아이가 꽃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놀이가 아닌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순간 판타지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놀이다. 아이들이 놀기를 바란다면 부모와 교사가 먼저 놀면 된다.
- 한국의 부모와 교사는 놀이기구가 있어야 놀이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놀이터는 유럽 같은 다른 나라에서 베껴 온 것 같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놀이기구가 아니라 스포츠 기구에 가깝다. 움직임만을 유도하는 기구이지 놀이기구가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이들이 순서를 기다려서 미끄럼틀을 온종일 여섯 번, 최대 열 번 탔다고 했을 때, 모두 합쳐 2분 30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놀이일까. 부모들이 놀이터의 상징으로 놀이기구를 떠올리는 그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오히려 놀이터 공간 자체가 놀이기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는 "하지 마라, 위험하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댄다. 그런데 아이들을 잘 보면 미끄럼틀 타는 그 시간에 노는 게 아니라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면서 논다. 그런데 부모는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 놀이란 직접 해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이런 것이 허용되는 놀이기구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움직이고 운동하는 것은 놀이가 아니다.
- 현재 한국 공공놀이터의 참담한 상상력은 '안전 신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전만을 오래도록 강조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조금의 모험도 허용하지 않는, 재미없고 지루한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놀이터 안전 신화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며, 안전 강조에 따른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인가?
왜 안전이 강조되는가 하면 첫 번째는 과잉보호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많으면 서로 돌보면서 크게 되는데, 요즘은 하나밖에 낳지 않으니까 당연히 과잉보호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어른들이 아무리 안전하게 놀이터를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도, 아이들은 그것을 넘어 제 맘대로 조작하려고 한다. 도전적 요소를 반드시 넣어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심하게 기존의 것들을 다르게 조작하려고 한다.
안전이 강조되는 두 번째 이유는 놀이기구를 만드는 회사에 원인이 있다. 그들은 물건을 팔아야 하고 누군가는 사야 하는데, 가장 많이 팔 수 있는 방법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을 만족시킨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보험회사이다. 보험회사는 사고가 나면 어디에 돈을 줘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그래서 표준을 만들거나 공장에서 놀이기구를 제조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만들면 허리를 다치고, 저렇게 만들면 어깨를 다칠 수 있다'는 식으로 조목조목 따지고 살핀다. 그들은 다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표준화 테스트를 하는데, 오로지 숫자에 의존한다. '이 길이가 맞다. 저 길이는 틀렸다'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숫자만 이야기하지 아이를 보지 않는다. 공장과 회사는 오로지 돈에만 관심 있으니까 보험과 표준치라는 것이 한 패가 되어 판매에만 집중한다. 회사나 공장에서는 보험과 표준치의 기준에 맞춘 제품을 만들어서 많이 팔기만 하면 된다. 이런 이유로 놀이기구의 안전이 강조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먼저 보험 이야기에 주목한다.
- 한국에서 놀이터를 누가 만들어야 하는지 물으면 건축사도 내 일이다, 조경사도 내 일이다 그런다. 거기에 놀이터 디자이너까지. 놀이터 만들기는 누구의 일이며 누가 해야 하는가?
왜 다들 자신이 적격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 뿌리는 모든 어른들이 다 아이들이었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놀이터를 잘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동기에 대한 해석을 성인의 관점에서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당시의 아동기와 요즘 아이들이 느끼는 아동기는 다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아동기에 거리를 두고 지금의 아이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건축가나 조경사는 아동기를 성인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 놀이터 전문가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이터가 깨끗하고 안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노는 공간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 곳이다. 그러므로 놀이터를 만드는 일을 꼭 전문가가 도맡아 할 필요는 없다. 부모도 좋다. 교육운동가도 좋다. 다만 10~20년 정도 아이들 놀이를 관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뭘 하는지,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온 부모는 뭘 하는지 오래도록 지켜본 사람이 필요하다.
반달리즘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500년 전 아이들이 뭘 했는지, 이런 거 말고 지금 아이들에 집중해야 한다. 놀이터를 볼 때도 흔히 '저 아이 나쁜 아이다', '놀이기구 저렇게 타면 안 된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아이와 부모가 놀이터에서 뭘 하는지 볼 수 있는 사람이 놀이터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한다.
아이들이 놀 때 어른들은 머릿속으로 안전하기를 바라는데, 사실 아이들은 파괴하고 망치며 논다. 그런 모습을 본 어른들은 '어! 아이들이 저거 망가뜨린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다.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이다.
- 선생님과 며칠을 함께 다니면서 보니, 강연을 마치면 늘 한국의 오래된 건축물들을 보러 다니셨다. '우리나라 놀이터에 한국 전통의 숨결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놀이터를 만들 때 외형을 보면 장식마저 서구적 장식을 따라 한다. 예를 들면 뜬금없이 놀이터 기둥에 야자수를 매달아 놓는다. 어떤 경우는 통째로 스웨덴 미끄럼틀을 사다가 꽂아놓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적 놀이터 양식은 왜 고민하지 않는 걸까?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 미국으로부터 자유를 선물 받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봐라. 미국은 역사가 없는 나라다.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나라일 뿐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왜 자신들의 것을 말하거나, 표현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가.
한국의 놀이터 또한 그런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한국적인 삶의 방식이나 문화를 만나고 찾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한국에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것을 느끼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한국적인 자산을 충분히 인식하고 놀이터를 만들 때 반영하면서, 시대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한국에 와서 한국적인 건축을 보러 다니는 까닭은 '한국 아이들은 이런 것 속에서 자신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가지겠구나' 하는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적인 것의 좋은 점을 내가 알아야 한국 놀이터에 관해 조언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놀이에는 항상 '치유'가 포함되어 있다
- 외람되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렸을 때 왼손잡이셨고(당시만 해도 왼손잡이는 교정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ADHD와 가까운 면도 있었고, 게다가 난독증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아주 명랑하고 쾌활하신 모습인데,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게 되셨는지 알고 싶다. 이 질문을 드리는 까닭은 놀이라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놀이와 놀이터는 이런 아이들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나는 왼손잡이였고 ADHD와 난독증이 있었지만, 이것이 장애인지는 모르겠다. 놀이는 세상을 배우고 미래를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그 안에는 '치유'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봤다면, 아이들은 가상놀이를 통해 엄마 아빠 역할을 하고, 요리도 하면서 그 충격을 치유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본 것을 가지고 놀기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놀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언제 노는지를 보면 문제가 있을 때 놀고 싶어 하기도 하고, 평화를 유지하고 싶을 때 놀기도 하고,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놀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세상을 모방하면서 평화를 찾을 때까지 논다. 그래서 놀이는 치유다.
'장애아를 위한 놀이터'라는 말을 쓰지 말자. 왜냐하면 여자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남자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라는 말을 따로 안 쓰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놀이터나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들은 보통의 놀이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놀이를 하고 논다.
나는 놀이터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무엇이 다른지 오래 관찰했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그저 여자아이들은 차보다는 인형을 더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인형보다는 차를 더 좋아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마주하는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므로 똑같은 장소에서 놀게 해야 한다. 이 아이들에게 어떤 놀이기구를 주느냐, 어떤 특별한 장소와 공간을 주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갖고 어떻게 노느냐'가 더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충분히 놀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있는가'이다. 아이들이 노는 그 순간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 끝으로 놀이터를 혁신하려는 한국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은?
우리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스스로 알고 있는 아이를 말한다.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키우려면 스스로 좋은 것을 만들어보고, 좋은 것을 해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경험은 놀이를 통해서 할 수 있다.
[출처] 격월간 교육 잡지 '민들레'는 1999년 1월 '교육 곧 학교'라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삶이 곧 배움'이 되는 새로운 교육문화를 만들어 가고자 창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