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밀양 가는 버스를 보았다. 끝나지 않은 밀양...영화 '밀양'이 있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았고, 구원받았다'는 그 유괴살인범 앞에서, 일순간 망연자실했던 전도연의 질린 얼굴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살인자가 예수 믿고 용서받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 아니랴.
하지만, 그가 살해한 그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직 그를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당연히 입을 다물고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기다렸어야 했다.
'이제 다 용서받은 것'이라는 그 말은 살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잃은 그 엄마가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랴.
하지만 그 무서운 악행들과 그 피눈물 나는 아픔들로 점철된 뼈아픈 역사는, 오늘도 잠들지 못한다.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역사의 죄를 참회하고, 그들의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면, 그래 이제 다 잊자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그 악을 만난 고난이 결국, 우리를 강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런 경우에도, 그 악행의 결과로 덕을 본 자들이 아니라, 그 악행의 결과로 피눈물을 흘렸던 그 분들의 입에서 먼저,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칼을 들고 휘두른 그들은 말이 없고, 그 칼에 베인 찢긴 가슴들은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밀양은 잠들지 못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해야 할 때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악을 행한 사람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이다. 아직은 그 말을 듣고 아플 사람들이, 오해할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우리들의 기독교에는 우리를 잘 살게 해주는 하나님은 있다. 선진국이 되게 해주시고, 세계 최고가 되게 해주는 하나님은 있다.
그리고 밀양은 계속된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 어둠 속에 빛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에 눈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