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평화통일을위한기독인연대] 예수님이 거라사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있었다(마가복음 5:1-20). 그 사람은 그 마을의 골칫거리였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기에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러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해서 보기에 흉했을 뿐 아니라 불안감을 조성해서 마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마을의 수치이기도 했다. 한 때는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모두에게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셨다. 그에게 들어간 군대 귀신 떼를 쫓아내셔서 그를 멀쩡하게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가 멀쩡해진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요구했다. 마을의 골칫거리가 사라졌으니 고마워해야 할 것도 같은데 오히려 반대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 군대 귀신은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군대 귀신의 존재를 내면화해서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군대 귀신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이뤄졌던 것이다. 따라서 웬만한 것은 군대 귀신을 핑계로 쉽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 귀신이 사라져버리니까 오히려 그들이 불안해지고 그들의 평안이 깨졌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을 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도 저들처럼 북한의 존재를 내면화해서 우리 생활 가운데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선거 때와 같은 쟁점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북한발 도발 소식들이라든지, "빨갱이"로부터 "종북"으로 이어지는 '낙인찍기'라든지 하는 일들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이 일들은 마치 군대 귀신처럼, 실재라기보다 덧붙여진(augumented) 현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현상이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동네에서 추방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단의 현실과 북한의 존재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상태를 자기들의 존재 근거로 삼고 있는 이들이 통일을 용납할 리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위협이 사라지고 북한이라는 존재가 더 이상 저들의 방패가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로서는 어떻게든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이고, 결국 이는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이들로부터 생산되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 전체를 불안과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들을 보면서 군대 귀신이 떠나간 후에 보인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국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던 사람과 마을 전체를 회복시키셨다.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일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야 말로 우리 시대의 군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맡아서 해야 하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글ㅣ고현영 수송교회 목사(평통기연 실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