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표 목사(예수제자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우리 삶의 전부는 무엇인가? 오늘날 사회 현상으로만 보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모든 것은 황금이 전부임이 틀림없다. 돈이 되면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생명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못하겠느냐? 12.12 사태의 주역들이 군인 연금을 달라고 재판에 재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철면피보다 더하다.

어느 재미교포 언론인이 말했듯이 역사에 죄를 짓고도 회개와 반성, 자기 성찰은 못할망정 법과 원칙이니 돈을 달라하였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사는 자들이 백주에 수천의 민을 학살하고도 자성하지 못하고 그 세금으로 자신들의 연금을 요청하다니 부끄러움으로 목숨을 끊지는 못할망정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지 십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새겨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파스칼), 혹은"생각하기 때문에 고로 존재 한다"(데까르트)라고 한 바 있는데 만일 정상적인 뇌 작동이 되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세월호 참사의 시기에 국민의 불신을 증폭 확대 시키고 심화 시키는 이런 소식을 들려주는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정치인들 모두를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 것은 다 아는 현실이다. 혹시 세월호 참사로 반사유익을 얻는다는 착각과 환상에 빠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는 민족과 나라, 국가와 사회, 문화의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럴 때를 틈타서 역사의 흑암이 밀려오는 것을 민감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그들의 밥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평화 통일의 길이 아닌 그들의 이해관계 속에 민족의 미래와 운명을 어둠으로 몰고 가는 조작된 국제 질서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고 자중지란에 빠져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수면 위에 남은 대한민국 호가 아예 역사의 바다 속에 빠져 사라지는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교회가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다시 정상적인 바다 위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과 마음을 다하여 구체적인 민족 살리기, 나라 살리기의 기도 운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신의가 매몰된 사회, 정직과 진실이 침몰한 사회, 희망을 상실하고 우울증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사회에서 우리의 고백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선포를 외쳐야만 한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 "예수그 리스도가 나의 생의 전부다"라는 고백은 어떻게 해서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첫 번째 책임은 정치인에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 듯이 그렇게만 보는 사람은 매우 소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소위 후진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악의 형태가 어디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인가?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동안 내전을 겪으면서 더욱이 냉전 속에서 미·소 강대국의 대리전쟁을 통하여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세월호와는 다른 죽음의 사건이지만 수천 명의 생명이 폭우로 백여 미터 흙속에 묻혔다. 정부는 그들을 캐낼 장비가 없다하여 '집단 무덤'을 선포 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비뚤어진 이슬람 폭력 분파(보코하람)들이 270여 명의 여자 아이들을 납치하여 인신매매에 넘긴다는 소식이다. 미디어를 통하여 전달되는 세계의 현상은 우리를 삶의 무의미와 우울로 빠뜨린다.

우리나라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가 중에서 '노인 자살' 1위와 '청소년 자살' 1위라는 집계를 가지고 있는 이때에 세월호 사건은 우리를 삶의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우리의 생애는 무엇이 전부가 되어야 하는 가? 우리가 사는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펴지기 힘든 일그러진 자화상을 어떻게 합리화 시킬 것인가?

나 자신이 사고 당사자 가 아니고 혹은 불행을 피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로 고백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자체로 나를 스스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추스려 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희망 없는 자책을 하며 가슴을 치고 애통해 하며 가슴을 찢고 하늘을 우러러 이 답담한 심정을 부르짖는 것으로 이 위기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의 고백은 결연한 각오와 결단을 다짐 하고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가 믿고 따르는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자신의 삶을 다 바치고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것일까? 그는 총리나 장관의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 기업의 총수가 되는 길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 때문에 맞고 감옥에 갇히며,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사형 선고를 여러 번 받는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선교의 나그네일 뿐 인데 이런 고백을 한다.

그의 한 번 밖에 없는 일생을 "오직 예수가 생의 전부"라는 고백을 하는 이러한 고백을 우리도 한 번이라도 해 본적이 있는가?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선교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한 목숨 바쳐도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해 볼일이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를 고가의 상품으로 선전하며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시도 한 적은 없는가? 우리의 인생의 삶은 무엇이 전부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가족, 직장, 나라와 국가, 아니면 사랑 아니면 맘몬, 우리는 솔직하게 무엇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하여 한 목숨을 순순히 내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인가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목숨이라도 바쳐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전적으로 따라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은총은 자칫하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요행이라 생각 할 수도 있다. 값싼 은혜를 버리고 내가 선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는 부름에 나의 존재를 던질 수 있는 결단의 삶을 매 순간 고백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 번의 생을 걸 만한 일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가난을 극복하는 일에 생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된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거처가 없는 집 없는 설움, 배를 움켜 주고 살아야 하는 사람 질병 중에도 치료비가 없어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일,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현실 등 돈이 없으면 천대와 멸시를 받는 가난의 경험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갖고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다. 권력의 정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 다음에 목숨을 걸만한 일은 소위 사랑일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서는 한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다.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만하다.

우리가 한 세상 살면서 기꺼이 한 목숨 바칠 수 있는 가치와 목표를 세웠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이비 교주의 유혹에 빠져 영혼을 팔고 그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맹세 하였다면 지금 그 지옥에서 온 힘을 다하여 빠져 나올 일이다.

만일 거짓된 권력자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충성 맹세를 하였다면 돌이켜 그곳으로부터 탈출해 나올 일이다. 거짓된 자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살고 있다면 미련 없이 그 길을 버리고 진정한 삶의 자유를 찾아 해방의 길을 찾아야 한다. 먹물 같은 허위의식의 지식인, 소유와 탐욕의 욕망의 굴레에서 썩어질 쾌락에 자기 목숨을 바치려 하는 어둠의 질곡으로부터 단호히 진정한 삶의 자유를 향한 탈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생명의 가치를 우리의 삶의 전부로 삼는 축복이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이 죄악의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우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류 신학의 이해이다. 그리고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려고 불의하고 폭력적인 악의 세력을 꾸짖고 회초리를 드신 분이시다.(민중과 해방 신학) 무론 해방의 차원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영적의 세 차원을 갖는다.

바울과 어거스틴, 마틴 루터 그리고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의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여기에 미흡한 구조악을 발견하고 이 구조악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구체적인 역사적 구원의 실천이 강조 된 것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흑인신학, 가부장적 인권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여성신학, 그리고 단지 사람만의 해방이 아니라 사람의 탐욕에 수탈 되고 착취당하는 자연과 범우주적 구원과 해방을 말하는 생태신학, 범 우주적 신학이 대두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린 구원이란 생각 할 수도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들의 구원과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신 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보며, 그리고 그러한 모든 십자가의 길을 마다 않고 끝까지 죽음을 떨치고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믿는 바울은 기꺼이 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를 위하여 바치겠다는 고백이다.

만일 이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 위대한 바울의 고백! 그 고백이 우리의 모든 탐욕과 불의를 성령의 불로 사르고 남음이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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