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5:1~20
본문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바로 데가볼리 지역이다. 데가볼리는 원래 헬라어로 데카폴리스라는 말인데 이는 열을 뜻하는 '데카'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 뜻은 그대로 10개의 도시(거라사, 스키토폴리스, 히포스, 가다라, 펠라, 필라델피아, 캐피톨리아, 가나다, 라파나, 다마스커스)를 가리킨다. 이 도시들은 주로 갈릴리 동쪽과 남쪽에 모여있는 헬라식 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북쪽 지역을 관장했던 셀루시드 왕조는 자신들의 헬라문화를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이 도시들을 세웠고 훗날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자치권을 부여 하는 동시에 도시들을 더욱더 발전시켰다. 특히 유대인들의 극심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로 골머리를 앓던 로마는 이 도시들을 로마식 스타일로 재건시켰다. 그러다 보니 데가볼리지역은 헬라와 로마의 이주민들과 셈족이 섞여서 사는 지역이 되었고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로 가득 찬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데가볼리 지역들을 방문해보면 고고학의 노력으로 많은 부분들이 재건되어 당시의 찬란한 문화유산들을 엿볼 수 있다. 곳곳에 로마식 원형극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포장도로와 아고라 그리고 여러 로마신들을 섬기던 신전들이 자리잡고 있다. 본문의 거라사로 추정되는 지역은 대략 3곳이다. 마태복음 8:28에서는 '가다라' 지방이라고 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거라사인의 지방이라고 한다. 보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느 쪽이든 모두 데가볼리에 속하는 지역이고 사실상 데가볼리에 속한 도시들의 생김새나 문화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는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서편지역은 유대인들의 마을이 있었고 동편지역은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성경은 이 갈릴리 동편지역을 가리켜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칭하였다(마 4:15; 사 9:1).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들과 이방문화로 가득한 데가볼리 지역이었고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그곳에 가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4:35에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으로 일부러 데가볼리 지역으로 향하신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원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고 길을 지나가는 자들에게 괴성을 질러댔다. 날카로운 돌로 자신의 몸을 긁어서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손목과 발목에는 끊어진 쇠사슬이 달려있었다. 그는 단순한 정신이상이 아닌 귀신에 사로잡혀서 미쳐 날뛰던 사람이었다. 귀신의 힘을 빌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를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실제 맞닥뜨렸다면 매우 두려웠을 이 사람을 왜 주님은 만나려 하셨을까? 이 만남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1. 오로지 예수님만이 사단의 결박을 끊을 수 있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사자(死者)의 도시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동네 전체가 무덤이다. 꽤 오래 전부터 형성된 이 공동묘지의 특징은 지붕만 없을 뿐이지 겉 모습은 일반집처럼 지었다는 것이다. 시신은 무덤집 지하에 안장되어 있다. 물론 이집트인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고 대부분 부유한 사람들의 무덤이다.
카이로에는 1700만명에 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주택난이 심각하다. 그러다보니 집을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무덤 마을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들이라고 죽은 사람들이 있는 무덤에서 사는 것이 좋지는 않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실업률이 심각하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 현재 그 수가 2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니 정말로 수많은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 무덤 마을 안에 전기도 들어오고 있으며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까지 들어섰다.
이런 무덤의 형태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근동 지역의 무덤은 굴을 파서 안장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부자들의 무덤은 마치 집처럼 꾸며져 있었다. 속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차려놓던 식탁(트리클리니움)까지 있다. 고대인들은 화려한 무덤을 통해 사후의 삶을 준비했다. 당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산자들의 곁에서 삶을 이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죽은 가족을 위해 주기적으로 음식을 가져다 두었다.
아마도 거라사 광인은 그런 무덤에서 살면서 죽은 자들을 위한 음식을 주워 먹었다. 유대인은 무덤을 부정하게 여겼으며 로마인들에게도 무덤은 내키는 장소가 아니었다. 핍박을 받던 초대교인들이 예배장소를 카타콤으로 삼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가리사의 광인이 무덤에서 죽은 자를 위해 남겨놓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는 것은 그의 상태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그를 제어할 수 없었고 골치거리인 그를 마을 외곽의 무덤으로 내쫓아버렸다.
이렇게 사단에게 메여있던 그를 예수께서 자유케 하셨다. 예수님은 멀리서 귀신이 떠나갈 것을 명령하셨다. 마치 백부장의 종에게 말씀으로 역사하셨던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말씀으로 귀신이 떠나갈 것을 명령하셨다. 아무리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의 권세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 달려와 자신을 그냥 그 사람의 몸에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를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묻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군대'라고 답했다. 이는 당시 로마군의 군단을 칭하는 말로서 로마의 1개 군단은 무려 6천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귀신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 도시의 영적상태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곳은 제우스나 아르테미스와 같은 화려한 이교신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제의는 마을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이자 삶의 기반이었다. 공공제식의 목적은 각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모든 주민들은 제사에 모두 참석했다. 그것은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삶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신들은 인간 공동체의 파트너로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협조한다고 생각했고 주민들은 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했다. 그것은 당시 사회협약이었다. 사실 초대기독교가 박해를 심하게 받았던 것은 이런 공공행사를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제사에 양이 제물로 주로 쓰였다면 이방종교에서는 주로 돼지가 많이 쓰였다. 마을 한 외곽에 돼지가 이천 마리나 사육되고 있었다는 사실은(13절) 그 마을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제식이 성대하게 진행되었고 마을 전체가 거짓신, 즉 사단을 숭배하는데 사로잡혀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던 예수님의 관심은 갈릴리 건너편의 이 이방 땅에도 동일하게 향하고 있었고 아무리 강한 사단의 역사가 지배하는 곳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귀신의 능력은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묶어도 제어할 수 없다. 사단은 우리의 삶을 결박하고 파괴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로 하여금 고통으로 소리지르게 만들고 우리의 육체를 상하게 하며 결국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떨어지게 만든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귀신이 들려 고통 받는 자들만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주님은 거라사 광인을 통해서 사단의 권세에 눌려있던 거라사 모든 시민들을 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 거라사는 오늘날 각종 음란과 세속문화로 물든 우리의 사회를 그대로 투영해주고 있다. 공중권세 잡은자가 휘두르는 오늘날의 세속적이고 음란한 문화는 우리의 역량을 넘어서기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다. 갖은 흉악한 범죄들이 넘쳐나고 퇴폐적인 환경들은 우리를 둘러싼다. 수많은 가정들이 파탄에 이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삶에 허덕이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 시대의 화두가 '힐링'을 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전체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분위기를 감지해 볼 수 있다. 어두운 밤만 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갖 해로운 것들로 자신의 몸을 병들게 하는 모습 속에서 거라사 광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다. 이런 악한 모습들은 직접적으로 귀신이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근원은 동일하게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 고통 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하다. 아무리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그 더러운 세력들이 죽음으로 치달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 사회의 개혁은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 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사회 속에서 더 울려 퍼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어느 때보다도 말씀이 각종 매체를 통해서 쏟아지고는 있지만 우리의 사회가 점점 악해지는 것을 보면 단순히 말세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한국교회가 전하는 메시지가 정말 순도 100%를 가진 주님의 말씀인지를 점검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살아 약동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이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2. 현실에 안주하는 자는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말씀은 모든 병든 자, 귀신에 사로 잡힌 자, 삶의 고통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할 힘이 있으나 그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결코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신 기적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거라사라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매달려도 결코 제어할 수 없는 그였기에 광인의 치유소식은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확인해보니 항상 벗고 날뛰던 그가 옷을 입고 있었고 평온한 얼굴로 정신까지 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 일에 매우 압도되었다. 15절에서는 그들이 놀란 나머지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적을 보기 위해서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은 어느 마을에 가시던지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거라사 광인은 치유되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이 너무 컸다. 다름아닌 이천 마리의 돼지가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 돼지의 주인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돼지가 부정한 동물이거나 더러운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군대귀신이 돼지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산에서 기르던 돼지떼는 거라사 종교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거라사에 있던 로마 신전에서 이방 사람들의 영혼을 망치게 만드는 이교 제사들의 핵심제물이었다. 사단이 쫓겨나고 돼지로 들어가 함께 몰살되는 것은 예수님의 출현 앞에서 사단이 관장하던 이교문화가 무너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직 예수께서 도시로 들어가지도 않으신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과연 우상과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 그 도시 속으로 예수께서 들어가셨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다른 이방지역을 돌아다닐 때 그리 큰 소동이 없었던 것을 보면 무슨 큰일이야 벌어졌었겠냐 만은 수많은 고통 받는 영혼들이 자유를 얻었을 일은 자명하다.
하지만 거라사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근심과 두려움이 자리잡았다. 예수님께서 오시자마자 큰 경제적 손실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했다고도 볼 수 없으니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도시 주변 곳곳에 수많은 돼지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천 마리가 수만 마리로 이어질 수 있었고 이는 곧 신전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경제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가리켰다. 귀신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던 환자가 온전함을 되찾은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현실의 경제적 득실에만 사로잡힌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 달가운 대상이 아니었으며 급기야 예수님이 강 건너편으로 다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다.
거라사 사람들은 약자들의 치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눈앞의 경제적 이득만을 쫓는 자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사단이든 예수님이든 자신들을 이롭게 하는 세력을 쫓는다. 그들은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을 반기기보다는 인간을 휘어잡고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사단의 세력과 함께하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따를 종교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다. 수많은 자들이 간증하듯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해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삶은 점점 윤택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죄 된 요소들은 예수님과 병행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사단의 요소들을 예수님께서는 없애가신다. 이전에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다가오심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이런 커다란 변화에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변화에 수긍하는 자들은 그 변화의 삶을 기쁨으로 여기지만 삶에 커다란 변화를 주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 추가하려는 자들에게는 심한 갈등과 내적 싸움이 시작되게 된다.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삶을 지탱해왔던 사람들은 어쩌면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할 도전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건전하지 못한 직장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고 비 윤리적 사업을 접을 수도 있으며 친구들이 모두 떠나갈 수도 있다. 이전에는 큰소리치고 살았던 자신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영혼의 평안을 얻자니 지불해야 하는 현실의 값이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실 가치는 충분하다. 밭에 숨겨진 보화를 얻기 위해 현재 나의 전 재산을 처분하듯이(마 13:44) 어떤 뼈아픈 희생을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붙잡아야만 한다. 그로 인해 내 앞날이 불투명해질까 두려울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멋지고 윤택하게 만들어가시는 분이시다. 아직도 자신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자들이 있다면 당장 그 고민을 멈추고 주님만을 붙잡으라. 예수께서는 결코 당신 삶의 첨가물이 아닌 핵심이 돼야만 한다.
3. 변화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바로 그분을 증거하는 일이다.
비록 거라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십자가 상에서도 악인들을 용서하셨던 그 긍휼의 마음은 오늘 본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고침 받은 광인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그 말에 순종했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놀랍게 여겼고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이방선교의 초석을 놓는 일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의 변화되었다면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복음을 전파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데가볼리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갈릴리를 건너 거라사 광인을 만나셨던 것처럼 우리를 만나셔서 변화시키신 이유도 바로 내가 속해 있는 곳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시작은 다름아닌 가족이 되어야만 한다. 그 어떤 자들보다도 가족은 이전의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변화가 생겼을 때 그 변화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변화는 그들에게 가장 큰 증거가 될 수 있다.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던 남편의 변화는 아내를 놀라게 만들고, 이기적이고 남편에게 불평불만만을 쏟아내던 아내의 변화는 남편을 놀라게 만든다. 항상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삶을 살아가던 자녀의 변화는 부모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 모든 것이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백할 때 어찌 그 복음을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악을 쓰고, 협박하고, 아무리 타일러도 변하지 않던 그들이 변화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변화는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오로지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능하다. 내안에 예수가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로 말미암은 당신의 변화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그들을 생명의 길로 충분히 인도할 수 있다.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었고 억압당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예수로 인한 자유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주님의 만남은 우리의 변화를 촉구한다. 이전에 사단에게 매여있던 삶을 내던지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것을 권한다. 그 선택은 항상 우리 앞에 놓여있다. 예수로 미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것들로 미칠 것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값진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더럽고 악한 문화 속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살아갈 것인가?
■ 원솜니 목사는...
칼빈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에서 10년 동안 전문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의 성지탐방을 인도하고 성경의 문화와 배경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왔다. 현재 평신도 전문신학기관인 갈렙바이블아카데미의 운영위원과 올리브공동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성경의 배경과 문화를 소개하는 올리브바이블스터디(www.olive.or.kr)를 운영하고 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