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과 한국의 시민사회' 심포지움.   ©이동윤 기자

고당 조만식 선생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무 및 경제문제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식은 도덕적으로 무결한 방법을 취할 것을 강조했다고, 윤은순 강사(숙명여대)가 '조만식의 생활개선운동'이란 발제를 통해 전했다.

윤 강사는 "(조만식 선생은) 경제적 이익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 것이 도덕과 인격이었다"며 "그가 생활개선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개인을 만드는 이상촌"이라고 말했다.

윤 강사는 "즉 기독교적 신앙을 토대로 고상한 인격과 도덕을 가진 개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일정한 수준 이상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조만식 선생은) 이를 '조선청년의 이상'으로 보았다"고 전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조만식과 한국의 시민사회' 심포지움은 3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길 감신대 웨슬리 제1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조만식과 한국의 시민사회'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진행되고 있다.   ©이동윤 기자

이날 심포지움에는 장규식 교수(중앙대)·윤은순 강사(숙명여대)·박명수 교수(서울신대)·정태식 교수(경북대)가 발제를 했으며, 윤경로 명예교수(한성대)와 한규무 교수(광주대)가 종합토론에 참여했다.

심포지움에서는 조만식 선생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했다. 조만식 선생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제 식민지기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하기도 해 소련군에 의해 연금당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두산백과사전은 "한국 정치가 겸 독립 운동가.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했다"고 쓰여 있다.

네이버캐스트는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윤은순 발제자(숙명여대 강사)   ©이동윤 기자

윤 강사는 조만식 선생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일제시기 일관되게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후 한국정치사상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며 "무엇보다 그는 한평생 외세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켰으며,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또 "그를 기억하거나 평가할 때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현실생활에 기초한 실천적 모습"이라며 "그것은 그가 믿고 의지한 기독교 사상과 관서지방의 상업전통을 체화한 신념과 의지가 녹아든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강사는 "조만식 선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짧은 두루마기에 말총 모자' 모습은 단순히 그의 외양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나타난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며 "조만식의 활동 중 가장 잘 알려진 물산장려운동의 '내 살림 내 것으로'의 모토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차림이라 하겠다"고 말했다.

기독교와 신학문을 접한 조만식 선생은 이전과는 구별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윤 강사는 설명했다.

"(조만식 선생은) 자신의 터전인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시키면서 명실상부한 관서지방의 대표적 민족운동가로 이름을 높이게 된다. 3·1운동 당시 평안도 일대 만세를 주도하다 체포된 그는 오산학교를 물러나 1921년 3월 평양 YMCA를 조직하고 총무직을 맡았다. 그는 이후 1932년까지 약 12년간 평양 YMCA 총무로 있으면서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그의 모든 활동은 평양 YMCA의 인적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이뤄지게 된다.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물산장려운동, 상공협회 조직, 저축조합 설립, 농촌운동, 생활개선운동, 절제운동을 전개할 때 평양 YMCA는 평양일대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이어 윤 강사는 1930년대 기독교 절제운동의 변화와 양상을 설명했다. 개신교 수용 초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술, 담배, 아편 등을 신자로서 일반인과 구별되는 성결한 자세로서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고 전했다. 또 종래 풍습 가운데 도박, 축첩 등의 반봉건적 폐단이라고 생각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윤 강사는 조만식 선생이 1930년대 들어 가장 진력한 운동으로 생활개선운동을 꼽았으며, 그는 이것을 민족의 사활을 지배하는 중요한 운동으로 인식하고 한층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윤 강사는 "조만식 선생은 금주·금연을 강조했다"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숭실학교에 입학하면서 일체의 술과 담배를 끊은 그는 개인의 결심에서 나아가 우선 금주·금연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고 말했다.

"조만식 선생은 금주운동을 단행할 이유로 '첫째, 정신적으로 살자 함이요 둘째, 경제적으로 살자 함이요 셋째, 문화적으로 살자 함이다'고 정리했다. 술은 모두를 패망케 하는 유일한 공구이며, 인간의 도덕적 작용을 못하게 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및 국가를 패망시키는 망물이라고 보았다."

윤 강사는 "또 조만식 선생은 각종 금주강연회에서 청년들의 각성과 금주를 촉구했다"면서 "대개 금주선전행렬 뒤에 이어지는 연설 중 보통 천여 명의 청중 앞에서 그가 금주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단연을 촉구하면, 열렬한 호응을 얻으며 개인적 결심과 금주회 조직 등의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규식 교수는 '물산장려운동에서 농촌운동으로 :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의 지형 변화와 조만식의 선택'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장 교수는 조만식의 민족운동이 물산장려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조만식 선생의 활동 반경은 평양 YMCA 총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산정현교회 장로, 숭인학교 교장, 신간회 평양지회 회장, 관서체육회 회장, 관서협동조합경리사 이사장,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 공동회장 등의 이력이 말해주듯 실로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장 교수는 "조만식 선생의 민족운동이 1920년대를 거치며 물산장려운동에서 농촌운동으로 중심을 이동하게 됐다"며 "농촌운동에 착수하면서 조만식의 사상적 지향은 점차 기독교 사회주의로 기울어 갔다"고 전했다.

또 장 교수는 조만식 선생의 활동을 평가하며 "물산장려운동에서 농촌운동으로 조만식 선생이 민족운동의 중심을 이동해 가는 과정은 개인 영혼의 속죄 구원에만 매달리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앙,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이기주의적인 신앙형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도전에 맞서 영육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경천애인의 참된 복음주의 신앙을 실천해 가는 힘겨운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정태식 교수는 '조만식의 실사구시적인 사회사상과 시민사회 운동'에 대해 발제했다. 정 교수는 "조만식 선생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지만, 자신의 사상이 고정적이거나 편협하지 않았다"며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안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조만식 선생은 모든 사상을, 그것이 사회주의이거나 사회복음주의이거나 사회진화론이거나, 받아들였지만 어느 특정한 사상에도 자신을 던지거나 내어주니 않았다"고 강조했다.

박명수 교수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만식'이라는 발제를 통해, 정치적인 면에서 조만식 선생의 역할과 활동 등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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