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이하 한복협)가 11일 오전 7시 강변교회(담임 허태성)에서 "한국교회 윤리적 삶을 진단하다"라는 주제로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정주채 목사 (한복협 중앙위원, 용인향상교회 은퇴)는 이 자리에서 "한국교회의 윤리문제를 진단한다 -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에 대한 신앙고백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본지는 한복협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이 발표 전문을 소개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전도보다 윤리운동을 먼저 해야 할 상황이다. 약 100년 전 부크만(Frank Buchman, 1878-1961) 목사가 일으켰던 도덕재무장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요망일 뿐 아니라 교회적 사회적 요청이다. 이는 윤리가 기독교신앙의 주된 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교회는 기독인들, 특히 목사들의 추락한 윤리생활로 인해 복음전도의 문이 닫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사로부터 말을 듣기보다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을 보기 원한다. 특히 현대는 비주얼 시대여서 보이는 것이 없으면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윤리는 신앙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에 대한 믿음 없이는 윤리는 그 설 자리조차 찾을 수 없다. 우주와 만물이 우연히 저절로 생겼고, 인간도 이성적인 존재의 설계가 아닌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윤리의 기준과 가치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런 기본적인 구도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윤리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윤리의 준거로서의 그리스도의 로드십
한국교회목회자윤리강령 첫 항목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선언이 있다. "하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을 거듭 확인하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그리스도의 주권에 도전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두려워 떨며(시 99:1) 삼갈 것을 다짐한다."
이 선언이 첫 번째로 나와야 할 이유는 윤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는 윤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옳고 그런 것은 개인의 가치관과 문화적인 다양성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사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윤리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것이 없으면 윤리의 기초도 없어지고 윤리적인 삶의 궁극적인 의미도 없어진다.
2. 윤리의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주되심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은 윤리를 보장하는 전제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관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또한 그 기초가 된다. 신앙은 관계이다. 교리적인 지식이나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관계이다. 그리고 인간이 갖는 대표적인 관계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라고 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라고 한다. 그런데 수평은 수직이 있어야 설정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좋아야 이웃과 올바르고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윤리란 주로 인간관계에 주어진 도덕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윤리의 기준이 없어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기우러지거나 환경과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바뀔 수밖에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은 윤리의 기초이며 기둥이다. 골 2:6-8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3. 윤리적인 삶을 뒷받침하는 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주되심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로 우리의 주가 되셨다(행 2:36, 빌 2:8-11). 그의 십자가로 우리를 대속하셔서 하나님께 용서받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해주셨다. 곧 관계회복이다. 인류의 조상이 범죄하고 난 후에 바로 나타난 현상은 관계의 깨어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고, 서로에게 죄를 전가하고 핑계하였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사 59:2),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킨 중보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모양이 보여주는 대로 그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또한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윤리의 기초라면 그의 십자가는 윤리적인 삶을 뒷받침하는 힘이다.
4. 윤리의 시금석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주되심
살후 2장 3,4절에서 "불법"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아노미아(ανομια)인데 직역하면 "무법(無法)"이다. 무법이란 법을 범한다는 말보다 더 강한 뜻이다. 법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위반한다는 뜻이며 도덕법의 존재자체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불법의 사람이란 바로 무법자이며 자기가 바로 법인 사람이다. 4절이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범사에서 최종결정을 자신이 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법자이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합당한 경외심을 갖지 못했을 땐 무법자처럼 되어 그리스도를 자주 반역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태도가 윤리적인 삶의 시금석이다.
시 99: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이 말씀은 청교도들이 표어로 삼았던 말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과 우주적 통치를 믿었으므로 범사에서 그를 경외하였다. 따라서 코람데오의 정신은 양심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이 우주적 통치권은 그리스도에게 위임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고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시며 만물의 통치자이심을 진심으로 믿고 경외할 때 윤리적인 생활이 보호되고 증진된다. 말을 바꾸어 하면 윤리적 타락은 바로 신앙의 타락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5. 주제와 관련된 실제적인 예
윤리적인 타락은 곧 신앙의 타락이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하였으니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그 나무인 교회가 어떤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1)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의 약화가 교회의 치리권 상실을 초래했다.
교인이나 목회자들 가운데 실수든 고의든 잘못하여 윤리적인 흠결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을 경우 일반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부인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로 소(訴)가 제기되면 교회(상급기관)가 이를 조사해서 치리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교회가 정부처럼 경찰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강제수사가 불가하고, 또 본래부터 교회의 치리란 도덕적 권위와 양심에 의존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피고나 원고의 진실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권징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범죄자가 주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거짓말을 한다면 합당한 치리는 불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선악을 분별하고 의를 세우는 일에 교회는 권위를 잃게 된다. 교회가 치리의 권위를 잃게 되니 신자나 목사들도 결국 정부의 사법기관에 호소하게 되고 결국 세상이 교회를 다스리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사법기관을 의존하는 이들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요즘 한국교회의 치리회는 노회나 총회가 아니라 법원의 판사들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면 교회는 무법천지가 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의 약화가 담임목사직 세습으로 나타났다.
담임목사직을 대물림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욕심이다. 대물림하는 목사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을 갖다 붙이지만 실제로는 세속적인 정욕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가 모운 재산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넘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처사이다.
그런데 이를 이렇게만 단순히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곧 불행하지만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예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이 리더십을 세습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같은 경우이다. 즉 교회의 로드십에 혼란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는 주로 대형교회에서 많이 일어나는 문제이다.
대형교회가 생겨나는 것은 목사의 세속적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목사가 유능하고, 영성이 높고, 말씀에 은혜가 있고, 출중한 리더십이 있을 때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게 돼있다. 그런데 목사와 교회가 특별히 경성해야 할 때가 바로 이런 때이다. 교회가 성장할수록 확인하고 강조해야 할 신앙고백은 교회의 주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다.
대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교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는다. 담임목사의 말 한 마디는 성경 말씀 이상으로 존중된다. 그러다보면 담임목사가 때로 하나님처럼 받들어지게 되고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교회의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 곧 교회 안에서 거의 절대적인 리더십을 갖게 된다. 이런 목사가 은퇴를 해야 할 경우 그 리더십의 공백을 메우거나 대체할만한 목사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교인들은 은퇴 후에도 그 담임목사의 영향력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습을 요구하게 된다. 목사도 교회의 안정과 리더십 교체에 따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세습에 동의하고, 그래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충성여부와 직접 관련돼 있다.
결언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의 교회다움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에 달려 있고, 신자의 영적 건강 곧 성령으로 충만함도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그 사람의 신앙과 생활 속에 어느 정도 확립돼 있는지 그 정도에 달려있다. 우리의 마음을 주재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를 경외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경외심은 범사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독려한다. 따라서 한국교회, 특히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실패와 타락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의 약화내지 불신에 기인한다. 마 7:17-23의 말씀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듣고 정신을 차려야 할 말씀이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정주채 목사 (한복협 중앙위원, 용인향상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