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구소련 개방, 개혁 정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앙아시아 선교 역사가 올해로 25주년을 맞았다. 그 동안 전세계 이슬람권 중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한국 선교사가 파송된 중앙아시아 선교에 대해 현지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김다니엘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 중 약 70% 가 고려인, 러시아인 등 일부 종족 사역에 국한되어 있다"며 "향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역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 선교사는 선교타임즈 최신호에 실린 '중앙아시아권 선교 25년 평가와 과제'에서 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연방) 해체 이후 70년 간 '복음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를 소개하고 종교 및 교회 상황과 전망을 제시했다.
무신론 교육 받은 무슬림들
중앙아시아는 8세기부터 아랍에서 유입된 이슬람이 유목민들의 샤머니즘, 토테미즘, 민간신앙에 덧입혀져 '투르크인은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표방해왔다. 하지만 18세기부터 남하정책을 추진한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에 대한 식민지배를 공식화하면서 양, 염소, 말 등 가축과 함께 광활한 땅을 누비며 자유롭게 살던 이들을 통제했다.
슬라브계를 비롯한 9개의 백인 공화국과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6개 아시아계 공화국으로 구성된 소연방이 붕괴된 후에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지키스탄 등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공화국이 차례로 독립했다.
특히 타지키스탄은 이란(폐르시아)계, 나머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투르크계(돌궐)계 민족으로 구성됐다.
김 선교사는 "소연방 통치기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가슴에 이슬람을 묻고 얼굴에 소비에트라는 가면을 쓰고 철저하게 무신론 교육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며 "'철의 장막' 속에 바벨론 포로와 같은 유수기를 보낸 이들은 외부 세계를 볼 수도, 나갈 수도 없었고 외부 세계의 서방 기독교 국가들도 15개 연방국가인 소련을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 지역은 세계 교회가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했고 복음은 철저히 차단됐다"며 "밭에 감춰진 보화같이 오랫동안 세계 선교의 밭 한가운데 깊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했다.
적극적 포교를 통한 이슬람 급부상
김다니엘 선교사는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권이며, 주민인 투르크인은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실제로는 이슬람화 이전에 정신, 현실적 문제를 지배했던 과거 종교들이 복합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큰 영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고대 종교였던 샤머니즘이 문화, 관습에 여전히 남아 '무속적 이슬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이슬람 세력이 크게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슬람 사원 재건축, 이슬람 학교 증가, 코란, 하디스 등 이슬람 서적의 보급과 판매량 증가 등이 그 예다. 또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슬람 모자를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에 파견된 이슬람 포교사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기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포교사를 파송했다"며 "이들은 훨씬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슬람 포교사는 최신식 이슬람 사원, 문화원, 특수전문학교, 병원, 일반 대학 및 이슬람 대학 등을 통해 친 중동, 친 이슬람 전문가를 양성하면서 이슬람으로 회기를 강조하고 있다.
고려인, 러시아인 사역은 활발, 주류 투르크인 사역은 미약
구소련 개방 이후 한국교회, 선교단체의 북방사역은 본격화됐다. 특히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문이 열리자마자 한국, 미국의 한인 선교사들은 우리 동포인 고려인(카레이스키)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교회를 개척했다. 김다니엘 선교사는 "중앙아시아 선교사역 초기의 대부분 선교사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고려인과 러시아인을 주 사역대상으로 삼고, 고려인 중 한국어를 아는 통역자를 세워 사역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초기 5년 동안 한인 선교사들은 고려인 마을마다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했다. 이에 미국 남침례교 선교부는 1996년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역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며 선교사들을 재배치하기도 했다. 그는 "1천 명 이상 고려인이 거주하는 마을에 1~2개의 고려인 등록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만 당시 60개가 넘는 고려인 등록교회가 있었다. 그는 "또 복음의 수용성이 높은 민족을 대상으로 러시아어로 공개사역을 하며 다민족 교회들이 개척됐다"며 "초기 10년 동안은 고려인, 러시아인에 대한 사역은 충분한 열매를 거두고 역동적 사역이 이뤄져 많은 등록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김 선교사는 "그러나 중앙아시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현지 투르크인을 위한 사역기반은 매우 미약했다"며 "사역 초기 대부분 민족에게는 완역된 성경이 없었고, 지금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서만 완역된 성경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완역된 성경이 출판되지 않아 신약만 사용하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국제대학생선교회의 '마케도니아프로젝트'를 통해 '예수' 영화가 각 민족어로 배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역사도 일어났다.
전문인 사역 통해 복음 전도 기회
김 선교사는 "2000년까지 중앙아시아 기독교인의 대부분 도시, 수도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고 거의가 고려인, 러시아인이었다"며 "정작 현지인인 투르크인 교회는 극히 소수이고, 정부도 현지인에 대한 복음전파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고 말했다. 현지인을 위한 공개 사역이 제한 받자 총체적 선교를 할 전문인 사역자가 요청됐고, 현지인 대상 사역자는 대부분 종교 비자가 아닌 전문인 신분으로 비자를 얻어 국가에서 인정하는 일을 했다.
이들은 NGO, 기관, 회사 등을 설립해 국가, 지방 정부에 등록하고 비자, 신분의 안정을 얻었다. 직접 전도와 공개적 기독교 활동이 금지된 보안 지역에서 사역자들은 사회활동으로 국가의 신임을 받았고, 국민의 마음을 열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 이들 선교사의 대부분은 NGO사역을 단순히 사회봉사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아 교회개척이라는 사역적 열매를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무료급식, 빈민구제, 장학금 지급,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탁아소, 방과 후 공부방, 미용실, 어학원, 컴퓨터학원, 음악·미술교실, 유치원, 학교, 병원, 문화센터 운영, 장애인 사역, 의료 진료 및 이동 진료, 직업 기술 훈련, 스포츠 사역, 연구소 설립 등을 통해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총체적 사역을 진행했다. 전문인 사역자 중 학교에서 학생 신분이나 교수 사역을 통해 현지 학생과 접촉할 기회를 갖고 제자를 세우기도 했다. 이들은 경영학, 회계학, 법학, 컴퓨터, 영어, 한국어 등을 가르치며 지식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사고와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김 선교사는 말했다.
그러나 투르크인을 위한 교회는 대부분 지하교회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몇 국가에서는 제한적으로 현지인 교회의 등록을 허락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현지인을 중심으로 수 년 전부터 정식교회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국가가 허락하지 않아 지하 가정교회 형태로 모이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 중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종교 탄압이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