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간판 앵커로 명성을 높인 김주하 아나운서의 어머니인 권영희 권사(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가 최근 한 전도세미나에서 ‘전도왕’이 된 사연을 밝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딸이 성공한 아나운서인만큼, 다른 사람들은 권 권사도 예전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녀의 삶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막내로서 온갖 사랑을 받고 자란 그녀는, 성공한 사업가를 만나 결혼했지만 7년 만에 남편의 사업 실패로 길바닥에 주저앉게 됐다. 결국 권 권사의 가정은 망원동의 가난한 동네 지하로 이사를 가게 됐다. 비가 오면 물난리가 많이 났기에 자다가도 일어나 물을 퍼내고, 해뜨면 남의 장독대 위에 이불을 말려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과 딸들이 있어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충격을 받아 쓰러졌던 남편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으니까 집에는 쌀도 연탄도 떨어졌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누워 있는 남편에게 애원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하 아빠는 폐인이 됐대”라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다.
그녀의 언니들은 “열녀 났다, 열녀 났어. 주하는 내가 길러줄 테니, 이혼해라”고 했고, 친정 식구들은 “남자가 돈을 못 벌면 너라도 벌어서 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라는 말로 가슴 아프게 했다. 권 권사의 가슴 속은 원망, 증오, 불평으로 끓어 올랐다.
권영희 권사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직장생활 한번 해본 일이 없었지만, 결국 용기를 내어 야쿠르트 배달을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다른 사람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땅바닥만 보며 일했다. 혹시 누가 무시할까봐 “남편이 돈 잘 버는데, 제가 용돈 벌려고 나왔어요”라며 거짓말을 할 때는 마음 속에 눈물이 흘렀다.
배달하는 길이 험해서 넘어지고 구르기를 여러 차례, 허리에 디스크까지 생겼다. 낮에는 중노동을 하니 밤에는 편히 자야 했는데, 허리 통증 때문에 밤을 샐 때가 많았다. 그때부터 권 권사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면 뭐할까, 차라리 죽으면 편할 것 같다”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죽으려고 마음 먹어도, 그러면 남편과 딸이 따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하루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새벽녘에 겨우 잠에 들었는데, 어린 시절 동네에서 듣던 교회의 종소리가 귀가 터질 듯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에게 교회의 종소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권 권사의 아버지도 장로를 만나면 구타할 정도로 교회를 경멸했었고, 어머니도 하루도 빠짐 없이 새벽에 일어나 불경을 읽던 불교 신자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권 권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며, 교회를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그날의 새벽의 종소리는 권 권사를 아무도 없는 개척교회의 십자가 불빛 앞으로 인도했다. 십자가의 붉은 빛을 보며 눈에서 하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왜 이렇게 됐나. 무슨 죽을 죄를 지었나. 주하 아빠는 언제까지 저렇게 폐인으로 있어야 하나”라는 신세한탄을 하며 엉엉 울었다.
한 시간 정도 울고 있는데, 성도들이 새벽기도를 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권 권사는 너무 창피해서 도망가면서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폭포수 소리에 잠이 깨어, 또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그렇게 새벽마다 그녀는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뒤 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는 자신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전도왕’이 된지는 4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한지는 10년이 넘는다.
권 권사는 전도의 비결에 대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목표를 높게 설정해야 한다”며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고 전했다. 이어 “저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의 복도 받아 주하가 잘 되었고, 물질의 복도 받았다”며 “하지만 죽어가는 영혼들 때문에 항상 목이 마르다”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만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는 권 권사는 마지막으로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