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에서 살고 있는 수영(가명·13살)은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10년째 할아버지(74)·할머니(70)와 살고 있다. 아버지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됐으며, 어머니는 5년 전 재혼했다. 어머니는 재혼 전까지 생활비를 보탰지만 그 이후연락까지 두절됐다.
수영은 꿈이 없다. 사실, 병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없으면 배우고 싶어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꿈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에게 이야기 해봤자 담배만 태우고, 할머니는 울기만 할 것이 뻔 하기에 수영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다.
또래 친구들보다 빨리 어른이 돼버린 수영은 추석을 맞아 받고 싶은 선물을 묻자 주저 없이 '속옷'을 꼽는다. 속옷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체육시간때마다 친구들이 교실에서 다 나간 뒤 체육복을 갈아입는 것도,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는 것도 속상하다. 월 평균 50만 원 정도 되는 할머니의 공공근로 임금으로 살아가는 게 빠듯하기에 속옷을 사달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수영의 신체 변화를 눈치 채고 선물로 사주면 좋으련만…….
지금 사는 월셋집은 벽에 군데군데 곰팡이가 폈지만, 아픈 할아버지를 위한 병원비와 약값도 모자라기에 이사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수영은 친구들과 소외감이 느껴져 말수도 줄어들고 공부에 흥미도 떨어졌다. 하루빨리 학업을 그만두고 취직해 돈을 벌고 싶은 마음뿐이다.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가출 또는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조부모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수영이 같은 조손가구수는 1995년 3만5194가구에서 2010년 6만9175가구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게다가 여성가족부 조사에 의하면 국내 조손가정의 월평균 수입이 59만7000원에 불과하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가구도 전체의 3분의 2나 된다.
조부모의 평균 연령이 72.6세인 데다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저학력(82%)이 많아 손자·손녀 교육에도 문제를 드러냈다. 조손가정 초등학생의 31.9%가 학교생활을 위한 요구사항으로 학습 도우미를 꼽았기 때문이다. 또 조손가정 중학생의 53.7%만 고교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반가정 중학생의 상급학교 진학률(99.6%)에 비하면 매우 낮은 치수다.
이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조손가구의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2일 목포에서 이혼한 자식을 대신해 힘겹게 손자를 키우던 70대 노인이 손자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25일에는 23년 전 아들을 버린 어머니가 아들이 수년전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나온 보험금을 달라며 할머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벌어졌다.
어린이재단 김유성 마케팅본부장은 "예전에는 이혼 시 서로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는데, 요즘은 짐이 된다고 싸운다. 이에 부모도 힘들다는 자녀양육을 여러 질환에 시달리는 조부모들이 떠안게 됐다"며 "다문화가구보다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이 사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조손가구다"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김 본부장은 "아이들이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소외를 경험하며 마음속 상처로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다. 이것이 사회에 대한 분노로 커지면 성인이 됐을 때 이 아이들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그는 아직은 정이 남아 있는 시골에 비해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는 도시의 조손가구가 더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밝혔다.
이런 점을 고려해 현재 어린이재단은 7600여명의 조손가정청소년에 매월 6억여 원씩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조부모와 아동의 의사소통 및 친밀감을 높이는 관계증진 프로그램, 캠프 및 상담 진행, 아동을 대상으로 한 조부모 이해 프로그램, 도시락 지원 등에도 나서고 있다.
김 본부장은 "꿈이 있는 아이들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며 조손가구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