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장 1~3절
(히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차를 타고 길을 가다가 가끔 뒤쪽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경찰차이고 자기 바로 뒤쪽에 있다면 곧 차를 길가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소방차이거나 구급차일 경우에는 자신의 차를 오른쪽 차선으로 바꾸면서 길을 터주면 됩니다.

전자의 경우야 운전자가 무엇인가 교통위반을 해서 그렇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왜 그렇게 하게 되어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 그 소방차나 구급차는 위기 혹은 위급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난 건물 안에 갇히게 된 사람들이나 교통사고 혹은 갑작스러운 쇼크 따위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의 힘으로써 구해낼 수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촌각을 다투며 소방차나 구급차가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야말로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구조작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중대하고도 시급하고도 위대한 역사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그것도 영벌의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사상최대의 영적 구조작업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서의 서론은 그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성취시키고 있는 핵심 요소 두 가지를 일목요연하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완전타락으로 인하여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아무 방법도, 힘도 없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친히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 계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는 '구조 방송'입니다.

본문 1절에 기록하기를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에게서만 나타나는 참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입니다. 

세상의 다른 신들은 다 인간의 상상이 창작해 놓은 추상적 존재 즉 '헛 것'이든지, 아니면 돌이나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물체 즉 '우상'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런 신들은 '말을 할 수도 없고 기도를 들을 수도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처럼 사람의 상상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신이 아니며 사람의 손이 제작한 조각품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 계시는 자존자'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즉 벙어리나 귀머거리 신이 아니라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시는 인격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옛적'이란 이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를 기준으로 한 '구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예언하는 사람'으로서 모세나 사무엘,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의 선지자는 그들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으면서 살았던 노아, 아브라함, 다윗 같은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도 다 포함됩니다.

그런 선지자나 또 선지자는 아니었더라도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면서 살았던 신앙의 인물들 수십 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우리 조상들에게" 즉 구약의 전 시대에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 각 세대마다 빠짐없이 '말씀'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말씀'을 통한 '계시'는 그처럼 '많은 전달자'를 통하여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다 동원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말씀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통하여 전해졌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러 부분"이라고 좀 어색하게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냥 '여러 번'(at many times)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실제로 최근에 나오는 성경들에서는 대부분이 다 이 번역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한 번만 말씀해 주시고 입을 딱 다무신 것이 아니라, 한 선지자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고 이스라엘의 조상 세대 사람들이 거역하고 불순종해도 또 다시 말씀해 주시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러 모양"이라고 번역된 말은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시를 주실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의사전달 수단들을 다 동원하셨음을 가리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말씀해 주기도 하셨고, 어떤 때에는 '하늘로서 들리는 육성'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려 주기도 하셨으며, 또는 구약에 때때로 등장하는 '성자 하나님의 현현'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해 주신 적도 자주 있었고, 그 외에도 꿈이나 환상 혹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 안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도 대답해 주시는 등,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해 주려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그 얼마나 정성을 동원하여 사람에게 '말씀하려' 하셨습니까?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선지자들'을 동원하셨고, 또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평생토록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으며, 그 방법 역시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들은 모두 다 동원하실 정도였으니 문자 그대로 '지극 정성'을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그처럼 애를 쓰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로 '죄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계시의 완성인 신구약 성경이 기록된 목적 역시 그래서 오직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인 것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장망성 안에서 필연적으로 죽어 가고 있는 죄인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총동원하시면서 끊임없이 지극히 정성스럽게 이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 처음으로 직접 목도했던 충격적인 사건이 바로 약 40여 년 전에 발생했던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각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10시간 이상 생방송을 했기 때문에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 끔찍한 재앙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소방차에는 고층 빌딩의 화재에 대한 장비가 미비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내 최고의 사다리차를 동원해도 겨우 7층까지밖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때 시청자들의 눈에 띈, 그리고 저도 보았던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은 탈출할 길이 막힌 투숙객들이 매트리스를 안고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땅에 닫는 순간에 매트리스가 자기 몸을 아래쪽에서 받쳐 줄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었고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처럼 높은 고층에서 떨어지는 충격을 매트리스가 흡수해 주기는 불가능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불에 타 죽게 될 것이라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심경으로 그렇게들 뛰어 내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처럼 추락사한 38명을 비롯하여 총 166명의 투숙객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당함으로써 호텔 화재 사건 피해 규모로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연각호텔 화재 당시 탈출하는 길이 하나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호텔의 옥상으로 올라가서 헬리콥터의 줄에 매달려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재 당시에 누군가 확성기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은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서 헬리콥터를 구조를 받는 길뿐이다."라고 계속 방송하는 소리를 저도 들었던 것입니다.

그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투숙객이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지시를 따라서 옥상으로 올라가서 헬리콥터에 매달려 탈출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1층으로 내려갈 수도 없고 창밖으로 뛰어내려도 살 길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화재에 휩싸인 사람들을 향하여 옥상으로 올라가야 구조 받을 수 있다고 방송을 한 사람이 경찰이었는지 소방대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목소리나 심정은 정말 애타는 것이었습니다. 그 화염과 혼란의 와중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구조 방송'의 소리가 투숙객에게 들려야 그들이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이야말로 바로 그처럼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귀에 간절히 들려주고 계시는 '구조 방송'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무슨 '고상한 도'나 '상식적인 윤리'를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닙니다. 듣기 좋고 유익하기도 한 '격언'이나 '금언' 따위를 모아 놓은 책도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사람이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이처럼 똑똑하고도 크게 외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이 성문계시를 내려 주신 목적은 오로지 '죄인 구원'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인간의 타락'과 '메시아 언약'으로 시작되고 있는 창세기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대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는 주제는 단 하나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 말씀대로 믿지 않으면 다른 구원의 길은 결코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길만이 죄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딱 한 길'인 것입니다. 화재 속에 갇힌 사람들이 오로지 '구조 방송을 들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만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간곡히 들려주고 계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인을 친히 찾아와 주신 '구조대원'이십니다.

그것이 곧 2절 상반절에서 "2a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는 말씀의 직접적인 의미는 '말세'의 뉘앙스가 강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에는 바로 앞에 나왔던 "옛날" 즉 구약 시대와 대조되는 '신약 시대' 전체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구약 시대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해 주셨던 정성만 해도 그야말로 이미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신 것 같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와서 실로 사람의 예상이나 상상까지 완전히 초월할 정도의 사건, 속된 표현을 좀 빌리자면 사람이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운 일까지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아들"이란 두말할 것 없이 '독생하신 성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성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것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화육강세를 의미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하늘에서 '확성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선지자'라는 메신저를 보내어서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와 만나셔서 우리 귀에 대고 직접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 것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보내 주신 계시와는 상대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월등합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선지자의 입술에 담아 주시고 성경에 기록하도록 해 놓으신 것이나, 당신의 아들의 입술에 담아 주시고 사도들로 하여금 듣게 하셔서 신약의 기록에 남긴 것이나, 그 전달의 효능성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전자나 후자나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자나 후자나 다 결국 사람의 언어로 기록이 되기는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이 계시 사역이 그토록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그 점에 대하여 이어지는 말씀이 대답해 줍니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지자'들과는 격이 크게 다르고 수준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을 전달한다 해도 어떤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느냐에 따라서 그 전달의 강도가 크게 달라지며 그 전해 듣는 사람의 경청하는 태도 역시 아주 다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장이 직원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려도 비서를 시켜서 전달하는 것과 부사장이나 이사 쯤 되는 사람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은 받는 쪽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절 하반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친히 전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구구절절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 하반절에 보면 "2b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후사"란 가문의 대를 잇는 사람, 혹은 법적 상속권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유의 후사' 즉 '만물의 상속자'라고 했으니 다시 말하자면 '온 세상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 전부를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의 말씀에서도 그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라고, 즉 세상 모든 만물과 만인들이 다 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아래 엎드리게 만드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님은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는 말씀대로 원래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이것 역시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3절에서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확증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아까 사장이 이사를 시켜서 무슨 지시를 내리는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그 사장이 자기의 회사를 물려주게 될 자기 아들을 통해서 회사 직원들에게 어떤 지시 사항을 내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에 이사의 말이 더 힘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장의 '후사' 즉 회사를 상속 받게 될 사장 아들의 말이 더 힘이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만유를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만유를 어떻게 관리하시고 누구에게 그 만유의 기업을 나누어 주시는가 하는 전권이 오직 예수님 한 분에게 다 위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예수님의 계시는 다른 그 어떤 구약 선지자의 예언보다도 훨씬 더 권위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금세와 내세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한 전권이 오직 이 성자 한 분에게 다 주어져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2절 하반절은 예수님께 부여된 '신적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이어지는 3절은 그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영광의 광채"란 바로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고 있는 내용과 그대로 상통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사람은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게 됨으로써 원래 사람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본체의 형상"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가리킵니다.

바로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즉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라'고 증거하는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적 영광'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까닭에, 그 사역 역시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똑같이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3절 하반절에서 "그의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했듯이, 로고스로서 천지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던 예수님은 그 만물을 보존하고 통치하시는 사역 역시 지금도 행하고 계십니다. 또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라는 말씀대로, '창조사역'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두 가지 가장 큰 일 중에 하나인 '구원사역' 역시 집행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예수님의 신적 영광에 대한 결정적인 사실을 가리켜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라고 결론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보좌 우편'은 오직 하나님만 앉으실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자리이므로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거기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계시는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계시보다 월등히 우수하고 강력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그대로 지니신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으니 그 '하나님의 말씀'은 필연적으로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성자께서는 각 사람에 대한 '속죄의 권세'가 있으신 '심판주'이신 까닭에, 우리는 그 분을 통해 주어진 계시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영생천당이냐 영벌지옥이냐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시느냐 아니냐 하는, 문자 그대로 '생사여탈권'이 바로 우리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정신 바짝 차려서 듣고 순종하며 그 분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말씀에 바로 그런 무게와 권위를 실으시기 위하여 그처럼 당신의 외아들을 친히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사역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소방대원 중에서도 '인명구조반'이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영어로는 'search and rescue team'이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찾아서 구조해 주는 팀'입니다. 

다른 대원들은 물을 뿌리면서 화재진압을 하는 동안 이 '인명구조반'은 아직도 불타고 있는 그 건물 속에 직접 들어가서 혹시 그 안에 부상을 입거나 의식을 잃고서 쓰려져 있는 사람을 찾아서 업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호가 바로 '다른 사람들은 피해나가는 곳으로 우리는 뛰어든다.'입니다. 그러니 물론 소방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일이며, 정말 '용기'와 '사명의식'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까지 찾아와 주신'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그런 '구원자'가 아니겠습니까? 소방대원이 그저 '구조 방송'만 보내지 않고 직접 자신의 몸을 던져 불속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구출해 주는 것만 보아도 정말 감동스러운데, 하물며 성자 하나님께서 그처럼 당신의 몸을 비하시키시고 그 영광의 보좌를 떠나 이 장망성 안에까지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세상에 이런 '구세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목숨을 거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시면서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살려 주시는 이 놀라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진심으로 뜨겁게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까 서론에서 '소방차'와 '구급차'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만약 사거리 같은 곳에서 이 두 차가 동시에 만났다고 한다면 어느 쪽에 우선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망성은 아주 희박하지만 하여튼 이론적으로는 그런 경우에 구급차가 소방차에게 양보하게 되어 있다고 어릴 적에 어디선가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구급차를 기다리는 환자보다는 화재현장에서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의 숫자가 아무래도 더 많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며 더구나 화재는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그 피해자가 급속히 늘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야말로 다른 그 어떤 인간의 '구조 작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최우선'이 되어야 할 일임에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이며 그대로 버려두면 영락없이 영벌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이보다 더 중차대하고 시급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옛적부터 지금까지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이처럼 간곡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계십니다. 

그 정도로 끝내지도 않으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아예 독생자를 통하여' 이처럼 강력한 '구원의 손'을 친히 내밀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의 계시'만이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오직 '성자의 화육강세'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베풀어 주신 실로 놀랍고도 고마운 구원의 '완성'이 되었음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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