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면서 조용히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무엇이 목회의 가장 큰 적인가? 종종 목회자들이 과로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아가 50대의 목회자들이 벌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비보도 종종 접하게 된다. 또 탈진한 목회자의 넋두리도 듣게 된다. 목회자가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는 슬픈 이야기도 접하게 된다. 목회자는 질병에 시달리는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과로에 지친 교인들에게 인생의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조언해야 한다. 유혹과 싸워 이기도록 믿음을 돋구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이 바로 그러한 고통과 탈진의 격류 속에서 헤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목회자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과욕이다. 무리 하게 목회하는 것이다. 몸을 돌보지 않고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 뛰어 들어 에너지를 불사른다. 그러나 목회자도 인간 인지라 체력의 한계가 있다. 설교로부터 교회 관리 그리고 사무원 노릇까지 일인 삼역을 다 감당하다 보면 어느 날 무너지게 된다. 나도 한 때는 개척 교회를 하면서 그런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무리한 목회 스케줄로 체력도 음성도 마구 사용하다가 훗날 큰 어려움을 당하는 목회자를 보게 된다.
목회자가 현재 자신의 상태,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목회의 무리수를 둘 때가 있다. 과도한 교회 건축, 교인들로부터 과도한 교회 성장 기대, 교인들의 무리한 돌봄의 요구의 압력에 빠져 탈진 현상을 좌초하게 된다. 이 때에 목회자는 자신 안의 틀에 갇혀 자기의 진액을 짜내는 곤욕을 치룬다. 현실의 좌표가 이상의 목표에 괴리감이 생기면서 목회자 안에 내부 균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균열이 결국 목회자를 파괴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그의 목회 경력, 가족 그리고 교회가 서서히 병이 들기도 한다. 더 무서운 것은 목회자는 더욱 더 단단한 자기 보호의 막을 두루고 위선과 깊은 고독 그리고 체념 가운데 방황하기도 한다.
교회란 역동적인 공동체이다. 교회는 수시로 변화하고 교인들의 구체적인 욕구도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떤 때는 교인들을 돌보는 일에, 어떤 때는 설교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어떤 때는 교회 경영적인 일에, 심방에 신경을 더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다양한 욕구와 많은 역할들이 목회자의 영육의 심신에 탈진을 주고 내부 정체성의 혼돈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목회자란 결국 이런 궁극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내가 부름을 받았는가? 하나님이 나를 무엇이 되게 하려고 부르셨는가? 젊은 시절에는 지나치게 과업 위주적인 목회를 한 적도 있었다. 교회를 성장 시키려고 무리하게 몸을 던진 때도 있었다. 교인들의 요구 앞에 목회자로서 소명감보다는 그들의 주문을 잘 소화하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결국 목회란 끊임없는 자기의 정체성과 씨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목회자로 불러 주신 분은 누구인가? 결국 목회자의 정체성은 자기를 불러 주신 하나님 앞에 늘 솔직하고 분명한 소명 의식 앞에 설 때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목회직이란 쉽게 실망하고 쉽게 의욕이 꺾일 수 있는 많은 장애물을 안고 걸어가는 길이다. 교인들도 목회자가 수퍼맨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 그에게도 슬픔이 있고 그도 때때로 고뇌가 있으면 그도 때때로 육체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눈에 의식하기 보다는 결국 자기를 목회자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부름을 늘 신선하게 의식하며 목회의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늘 목회에서 목회의 열정과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는 근원이 된다.
목회의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명예로운 은퇴의 길을 걸어가신 많은 목사님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내 뒤를 따라 오는 적지 않은 젊은 목회자들이 마지막 목회의 유종의 미를 거두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역으로 종결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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